백석 시인 / 산중음(山中吟)
□ 산숙(山宿)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어 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 향락(饗樂)
초생달이 귀신불같이 무서운 산골 거리에선 처마끝에 종이등의 불을 밝히고 쩌락쩌락 떡을 친다 감자떡이다 이젠 캄캄한 밤과 개울물 소리만이다
□ 야반(夜半)
토방에 승냥이 같은 강아지가 앉은 집 부엌으론 무럭무럭 하이얀 김이 난다 자정도 훨씬 지났는데 닭을 잡고 모밀국수를 누른다고 한다 어느 산(山) 옆에선 캥캥 여우가 운다
□ 백화(白樺)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조광, 1938. 3
백석 시인 / 산지(山地)
갈부던 같은 약수터의 산(山)거리 여인숙이 다래나무 지팽이와 같이 많다
시냇물이 버러지 소리를 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산(山) 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운다
소와 말은 도로 산(山)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 오면 산(山)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인가(人家) 근처로 뛰어 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침이면 부엉이가 무거웁게 날아온다 낮이 되면 더 무거웁게 날아가 버린다
산(山)너머 십오리(十五里)서 나무 둥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山)비에 촉촉히 젖어서 약(藥)물을 받으러 오는 산(山) 아이도 있다
아비가 앓는가 부다 다래 먹고 앓는가 부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조광, 1935. 11
백석 시인 / 석양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영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 대며 쇠리쇠리한 저녁 해 속에 사나운 짐승같이들 사라졌다
삼천리문학, 1938. 4
백석 시인 / 시기(柿崎)의 바다
저녁밥때 비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슥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해쓱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아 아즈내인데 병인(病人)은 미역 냄새 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누웠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안동(安東)
이방(異邦) 거리는 비 오듯 안개가 나리는 속에 안개 같은 비가 나리는 속에
이방(異邦) 거리는 콩기름 쫄이는 내음새 속에 섶누에번디 삶는 내음새 속에 이방(異邦) 거리는 도끼날 벼르는 돌물레 소리 속에 되광대 켜는 되양금 소리 속에
손톱을 시펄하니 기르고 기나긴 창꽈쯔를 즐즐 끌고 싶었다 만두(饅頭) 꼬깔을 눌러 쓰고 곰방대를 물고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향(香)내 높은 취향리(梨) 돌배 움퍽움퍽 씹으며 머리채 츠렁츠렁 발굽을 차는 꾸냥과 가즈런히 쌍마차(雙馬車) 몰아 가고 싶었다
조선일보, 193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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