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궁덜럭궁 색동헝겁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 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침을 뱉고 넘어가면 골 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집에는 언제나 센개 같은 게사니가 벅작궁 고아 내고 말 같은 개들이 떠들썩 짖어 대고 그리고 소거름 내음새 구수한 속에 엇송아지 히물쩍 너들씨는데
집에는 아배에 삼춘에 오마니에 오마니가 있어서 젖먹이를 마을 청눙 그늘 밑에 삿갓을 씌워 한종일내 뉘어 두고 김을 매러 다녔고 아이들이 큰마누래에 작은마누래에 제구실을 할 때면 종아지물본도 모르고 행길에 아이 송장이 거적때기에 말려 나가면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였고 그리고 끼때에는 부뚜막에 바가지를 아이들 수대로 주룬히 늘어 놓고 밥 한 덩이 질게 한 술 들여뜨려서는 먹였다는 소리를 언제나 두고 두고 하는데
일가들이 모두 범같이 무서워하는 이 노큰마니는 구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를 방구석에 들매나무 회초리를 단으로 쪄다 두고 때리고 싸리갱이에 갓진창을 매어 놓고 때리는데
내가 엄매 등에 업혀 가서 상사말같이 항약에 야기를 쓰면 한창 피는 함박꽃을 밑가지째 꺾어 주고 종대에 달린 제물배도 가지째 쪄 주고 그리고 그 애끼는 게사니 알도 두 손에 쥐어 주곤 하는데
우리 엄매가 나를 가지는 때 이 노큰마니는 어느 밤 크나큰 범이 한 마리 우리 선산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을 우리 엄매가 서울서 시집을 온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노큰마니의 당조카의 맏손자로 난 것을 대견하니 알뜰하니 기꺼이 여기는 것이었다
문장, 1939. 4
백석 시인 /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저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 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뚜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 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 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제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당구신 나는 고만 기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 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신세대, 1948. 5
백석 시인 / 미명계(未明界)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鰍湯)집의 부엌은 뜨수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히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별 사이로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행길에는 선장 대여가는 장꾼들의 종이등(燈)에 나귀눈이 빛났다 어디서 서러웁게 목탁(木鐸)을 두드리는 집이 있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북신(北新)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박혔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조선일보, 1939. 11. 9
백석 시인 / 산(山)
머리 빗기가 싫다면 니가 들구 나서 머리채를 끄을구 오른다는 산(山)이 있었다
산(山)너머는 겨드랑이에 깃이 돋아서 장수가 된다는 더꺼머리 총각들이 살아서 색시 처녀들을 잘도 업어 간다고 했다 산(山)마루에 서면 멀리 언제나 늘 그물그물 그늘만 친 건넛산(山)에서 벼락을 맞아 바윗돌이 되었다는 큰 땅괭이 한 마리 수염을 뻗치고 건너다보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도 그 쉬영꽃 진달래 빨가니 핀 꽃바위 너머 산(山)잔등에는 가지취 뻐꾹채 게루기 고사리 산(山)나물판 산(山)나물 냄새 물씬물씬 나는데 나는 복장노루를 따라 뛰었다
새한민보, 194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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