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광원(曠原)
흙꽃 이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가정거장(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차(車)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린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구장로(球場路)
삼리(三里) 밖 강(江) 쟁변엔 자개들에서 비멀이한 옷을 부숭부숭 말려 입고 오는 길인데 산(山)모롱고지 하나 도는 동안에 옷은 또 함북 젖었다
한 이십리(二十里) 가면 거리라던데 한겻 남아 걸어도 거리는 뵈이지 않는다 나는 어느 외진 산(山)길에서 만난 새악시가 곱기도 하던 것과 어느메 강(江)물 속에 들여다뵈이던 쏘가리가 한 자나 되게 크던 것을 생각하며 산(山)비에 젖었다는 말렸다 하며 오는 길이다
이젠 배도 출출히 고팠는데 어서 그 옹기장사가 온다는 거리로 들어가면 무엇보다도 먼저 `주류판매업(酒類販賣業)'이라고 써 붙인 집으로 들어가자
그 뜨수한 구들에서 따끈한 이십오도 소주나 한잔 마시고 그리고, 그 시래기국에 소 피를 넣고 두부를 두고 끓인 구수한 술국을 뜨끈히 몇 사발이고 왕사발로 몇 사발이고 먹자
조선일보, 1939. 9. 13.
백석 시인 / 귀농(歸農)
백구둔(白狗屯)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어나는 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임자 노왕(老王)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老王)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글거리고 고방엔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쌓이고 노왕(老王)은 채매도 힘이 들고 하루종일 백령조(百鈴鳥)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고 나는 이제 귀치 않은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 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老王)한테 얻는 것이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 한쪽 마을에는 마돝에 닭 개 짐승도 들떠들고 또 아이 어른 행길에 뜨락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는 가슴이 이 무슨 흥에 벅차오며 이 봄에는 이 밭에 감자 강냉이 수박에 오이며 당콩에 마늘과 파도 심그리라 생각한다
수박이 열면 수박을 먹으며 팔며 감자가 앉으면 감자를 먹으며 팔며 까막까치나 두더지 돝벌기가 와서 먹으면 먹는 대로 두어 두고 도적이 조금 걷어 가도 걷어 가는 대로 두어 두고 아, 노왕(老王), 나는 이렇게 생각하노라 나는 노왕(老王)을 보고 웃어 말한다
이리하여 노왕(老王)은 밭을 주어 마음이 한가하고 나는 밭을 얻어 마음이 편안하고 디퍽디퍽 눈을 밟으며 터벅터벅 흙도 덮으며 사물사물 햇볕은 목덜미에 간지러워서 노왕(老王)은 팔짱을 끼고 이랑을 걸어 나는 뒷짐을 지고 고랑을 걸어 밭을 나와 밭뚝을 돌아 도랑을 건너 행길을 돌아 지붕에 바람벽에 울바주에 볕살 쇠리쇠리한 마을을 가리키며 노왕(老王)은 나귀를 타고 앞에 가고 나는 노새를 타고 뒤에 따르고 마을 끝 충왕묘(蟲王廟)에 충왕(蟲王)을 찾아 뵈러 가는 길이다 토신묘(土神廟)에 토신(土神)도 찾아 뵈러 가는 길이다
조광, 194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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