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개
접시 귀에 소기름이나 소뿔등잔에 아주까리 기름을 켜는 마을에서는 겨울밤 개 짖는 소리가 반가웁다
이 무서운 밤을 아래웃방성 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있어 개는 짖는다
낮배 어느메 치코에 꿩이라도 걸려서 산(山)너머 국수집에 국수를 받으러 가는 사람이 있어도 개는 짖는다
김치 가재미선 동치미가 유별히 맛나게 익는 밤 아배가 밤참 국수를 받으러 가면 나는 큰마니의 돋보기를 쓰고 앉아 개 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현대조선문학전집, 1938
백석 시인 / 고방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 산적을 꿰었다
손자 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 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둑둑히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 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고성가도(固城街道)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씬하지 않는 마을은 해밝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참 피었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 고운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 것만 같은 마을이다
조선일보, 1936. 3. 7
백석 시인 / 고야(古夜)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山)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 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山)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무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어 다람쥐처럼 밝어 먹고 은행 여름을 인두불에 구워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위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워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병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무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메추라기를 잡아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 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 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 두고는 해를 묵혀 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아도 먹을 물이다
사슴, (자가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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