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 단장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사소(娑蘇): 사소(娑蘇)는 신라(新羅)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 처녀(處女)로 잉태(孕胎)하여, 산으로 신선수행(神仙修行)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獨白).
신라초, 정음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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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신화(朴赫居世神話)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壬子)---古本에는 건호 원년이라 했고 견원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3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덕 있는 사람을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했다.
이리하여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 옆에 번개빛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비치니 거기에 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 보니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쪼개니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동자(童子)가 나왔다.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니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로 인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
<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조>
서정주 시인 / 신록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떠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폴밭에 바람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 시인 / 푸르른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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