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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산수도(山水圖)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4.

신석정 시인 / 산수도(山水圖)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넘어 닥쳐 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르지 한 폭의 그림이냐?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작은 짐승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러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처럼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 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 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 ·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