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크세나키스 셈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3.

조향 시인 / 크세나키스 셈본

 

불 붙는 구레나룻.

직선은 구우텐베르크다.

하아얀 월요일.

혹독한 계절에.

`모든 동맥의 절단면에서 검은 아스팔트의 피를 떨어뜨리는 도시(都市)'

아자(亞字) 창(窓).

백 밀러. 까아만.

눈동자가. 안으로.

에메랄드의 층계. 내려 가면.

메스카린의 환각(幻覺)이.

가시내 냄새도.

어휘는 낙엽인데.

붉은 닥세리. 찢어진 밤의

주름 사이에 켜지는 육체들.

크세나키스의 셈본.

회회청 하늘엔.

총탄 자국이. 글쎄.

난만한 회색이다.

칠십(七十) 년대. 그리고.

동요(童謠)만 피어 나는데.

  동빙고동은 도둑의 마을

  동빙고동은 도둑의 마을

안개. 그리고.

검다.

 

신동아, 1970. 3

 

 


 

 

조향 시인 / 태백산맥(太白山脈)

 

 

날짐승 길짐승 박달나무 산딸기 더덕순 도라지에 풀잎 넌출 이리저리 얽혀서, 시냇물 소리 졸졸 이슬도 하무뭇이 생명의 풍성한 씸포니

 

웃음도 울음도 가난함도 외로움도 모주리 겨레와 함께 겪어 온 세월에, 별처럼 아른아른 추억의 조각 조각들, 돌아볼쑤록 꿈인 양 머언 날이 있어라

 

날개 활활 치려무나 독수리! 너 그리는 너그러운 창공의 원(圓)! 그 써―클 밑에 아슴히 구비쳐 솟은 머언 산맥, 남으로 남으로만 벋어 나린 산줄기야!

 

초록 눈부시게 부풀어 오르는 계절 돌아오면, 너의 완연한 모습은 영원을 노래하는 줄기찬 리듬! 활활 풍기는 산정기 박하냄새 짐승의 발자국 냄새 얽혀진 너의 야성의 생리―그 송가 높이 부르렴!

 

태곳적 이곳에 첨으로 빗방울 떨어져 내려 한 방울은 동으로 또 한 방울은 서쪽 사태를 굴러  내려, 아! 여기 위대한 분수령(分水嶺)― 너는 조선(朝鮮)의 등성이뼈로 충성의 역사를 살아 왔고

 

다시 그 옛날 아득한 그 무렵에, 이 나라의 젊은 넋, 청춘의 군라상(群裸像)이 츨ㄱ잎 뜯어 몸 가리우고 굵다란 로망(ROMAN)의 산허릴 넘던 날, 우렁찬 그 민족의 코러스에 동해도 우쭐거려 퍼더기었다, 울릉도는 머언 하늘 갓에 사뭇 흐려만 보였다

 

달 밝은 밤, 별 송송 푸른 밤, 칠백리 구비구비 돌아 흐르는 낙동강 잔물결 위에, 골작마다 깃들인 흰 겨레의 평화론 숨소릴 조심조심 새겨 왔으나

 

아 언제부터 불행과 슬픔은 너의 옷자락을 핥기로 했으며 그 어느 원한의 때로부터 이 강토의 운명은 너의 허리 춤에다 사슬을 감았던가?

 

오늘 다시 불길한 일식(日蝕)의 그늘에서 귀신처럼 히히! 웃으며 너의 순결을 짓밟고 영원해야 할 연륜(年輪)에다 붉은 도낏날을 넣는 반역의 형제들 있어, 큼을 섬기는 슬픈 습성이 인민의 앞길에다 암담을 수놓는 이날

 

태백아! 모진 짐승인 양 굵게 사납게 몸부림 쳐라. 엄한 부성(父性)처럼 추상같이 꾸짖어라! 그리하여 천년 묵은 침묵을 찢고 화산 그러하듯이 인젠 진정 터져라!

 

죽순, 1947. 10

 

 


 

 

조향 시인 / 파아란 항해(航海)

 

 

가뱝게 꾸민 등의자는 남쪽을 향하여 앉았다. 앞에는 바다가 신문지처럼 깔려 있고…… 바다는 원색판 그라비유어인 양 몹시 기하학적인 각선(脚線)을 가진 테―불 위에는 하얀 한 나프킨이 파닥이고 곁에는 글쎄……글자를 잃어버린 순수한 시집(詩集)이 바닷바람을 반긴다.

 

꽃밭에는 인노브제크티비테*의 데사잉! 당신의 젖가슴엔 씨크라멘의 훈장이 격이세요.

 

석고빛 층층대를 재빨리 돌아 올라 가면 거기 양관의 아―취타잎 유리창 여기선 푸른 해도(海圖)가 한 핀트로만 모여 든다.

 

IRIS OUT!

렌즈에는 해조(海鳥)의 휘규어!

 

―― 그대는 인민의 항구가 그립지 않습니까?

―― 새로운 로맨티즘의 영토로…… 그렇죠?

수평선 위에 넘실거리는 새 전설의 곡선! 나는 산술책을 팽개치고 백마포(白麻布) 양복 저고릴 입는다. 나는 파아란 항해에 취한다. 나는 수부처럼 외롭구나.

 

19××년 향그런 무역풍 불어 오는 밝은 계절의 그 어느날 그대는 여기서 내 사상의 화석을 발견하시려는 건가?

 

나는 언제나 조선이 사뭇 그리울게니라.

 

ADIEU!

 

*인노브제크티비테: 비대상성(非對象性)

 

죽순, 1947. 8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