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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성(聖)바오로 병원(病院)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2.

조향 시인 / 성(聖)바오로 병원(病院)의……

 

 

성(聖)바오로 병원의 때묻은 우울한 석고상(石膏像)을 왼편으로 흘겨 보면서.

나는 아침마다 펼쳐진 서울의 퀴퀴한 내장(內臟)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그래도 화려한 액센트 서콘플렉스(accent circonflexe)를 쓰고 다니는 요족(凹族)들의 계절은 와 있는데.

산상(山上)의 수훈(垂訓)은 일평생(一平生) 식물성(植物性)이다.

허무(虛無)를 한없이 분비(分泌)하는 곤충(昆蟲)들의 미학(美學)이 빌딩문을 드나드는 오후면.

푸른 수액(樹液)이 흐르는 너의 얼굴은 크로포트킨(Kropotkin)의 자연지리학(自然地理學) 교과서(敎科書) 곁에서 무던히는 심심하다.

반사경(反射鏡) 안에 고즈넉히 갇혀 있는 나비는 왕자(王子)의 체온을 지니면서.

아아. 나의 세인트 헬레느.

거무죽죽한 골목엘 들어서니까, 젖가슴을 내밀고 느런히 서 있는 여체(女體)의 톨소들이 일제히 웃어댄다.

성원자력원(聖原子力院) 앞에서 이족수(二足獸)들은 누더기 훈장을 달고. 실직(失職)한 강아지는 거울의 숲 속에서 절망을 잴강잴강 씹으면서.

`나는, 나를 매혹하는 이 절망에 의하여 살고 있다.'

파아란 수목의 생리 속에 피어난 야외(野外) 조각전(彫刻展) 곁을, 연두빛 바람이 지나가면. 팅게리가 댕그렁거리고.

나의 연초점(軟焦點)에 와서 잠시 머무는 하아얀 너는 메론의 공화국이다.

도시(都市)는 이젠 사막이다. 붉은 닭세리.

이윽고, 하늘이 내리쉬는 검은 입김. 그 가운데 네온이 켜져 가면. 성당(聖堂)의 종소리. 이 검은 샤마니즘의 거창한 체계(體系). 에로이 에로이 라마 사바크타니.

구나방들의 군화에 짓이겨져 가는 장미랑 비둘기랑 모두모두…….

전갈좌(座)는 나의 성좌(星座)다.

미래(未來)는 시궁창에 쳐박혀서 궂은 비나 맞으면서 있고.

그리하여 지구(地球)의 레이아우트는 검은 빛이다 검은 빛이다.

 

현대문학, 1968. 8

 

 


 

 

조향 시인 / 조개

부제: 박생광씨(朴生光氏) 화(畵) `조개'에 제(題)함

 

 

      내 귀는 조개껍질인가

      바다 소리만 그리워라

       ― JEAN COCTEAU, 「귀」

 

그믐

새까만 밤 하늘에

차라리 파아랗게 질리는 꿈이다

 

어린 양떼처럼 어디로들 몰려 갔느냐

별 별 푸른 별들아

하늘의 목동의 군호 소리도 없는데……

 

밤 새까매질수록에 하얘만 지는 바다 모랫벌

뱅뱅 꼬인 나선(螺旋) 주류에 앵 우는 바람이 그리워

허울 좋게 소라는 누었다

 

조개도 불퉁이도 아가미 벌려 밤을 마시고

바닷지렁이 길게 늘어져 있네

 

한 오리 불어 넘는 로망(ROMAN)의 바람도 없이

바다의 어린 겨레는 칠같은 밤에

차겁다

한사코 외롭다

 

자꾸만 멀어지는 바다 우짖음

싸아늘히 회도는 향수(鄕愁)야!

 

유성(流星)이려거든 동쪽으로 흘러라

 

밤이 한 고개 넘어 소연(騷然)한 새벽엔

굵은 행동의 곡선 다시는 늘이어라

바다는 짙푸른 생명의 영원에로 닫는다

 

4281년 정월, 진주(晋州) 다방(茶房) `화랑(畵廊)'에서

 

영남문학, 1948

 

 


 

 

조향 시인 / 초야(初夜)

 

 

일찌기 오욕(汚辱)을 배우지 못한

박날나무 처녀림(處女林)이래도 좋겠소!

 

한자옥 들여놓기도 못미쳐

끝까지 수줍고 정결(淨潔)한 훈향(薰香)에

마음 되려 허전할까 저윽이 두려워―.

 

쌍촉대(燭臺) 뛰는 불빛!

둘리운 병풍(屛風)엔 원앙(鴛鴦) 한 쌍이

미끄럽게 헤이고 속삭이고―.

 

댕그렁! 밤이 깊어가도

벽만이 그렇게 한결 정다웠던지

신부(新婦)는 순박(純朴)을 안고 그만 면벽(面壁)

― 마치 한 개 백고여상(白膏女像)!

 

원앙금침(鴛鴦衾枕)이 하마터면 울었을걸

신랑(新郞)의 서투른 손이나마

고즈넉이 쓰다듬었기에―.

 

매일신보, 1941. 4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