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BON VOYAGE!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1.

조향 시인 / BON VOYAGE!

 

 

□ 1.

 

   BARCELONA

아 BARCELONA로

 

□ 2.

 

은빛 꼬마 스푸운을 조심스레 잠글라치면 짙은 세피아의 물결이 가울탕 잔(盞) 전에 남실거리며 소녀(少女)가 마악 부어 주고 간 우유(牛乳)가 가라앉았다간 송이송이 구름이 되어 피어 오른다

 

유리창 바깥엔 수많은 전옥(典獄)들처럼 거니는 어스름이 와 있는데 다시 가슴팍을 후비는 뱃고동이 울거들랑 버릇마냥 낡아 버린 항해도(航海圖)에다 애라(愛羅)! 불을 켜기로 하자

 

파아카아드 빨간 미등(尾燈)이 미끄러진 뒤 나의 에크랑에 굴절(屈折)하는 이십세기(二十世紀)의 서정(抒情)의 포제(Pose)

 

빌딩 모롱이에서 예각(銳角)을 그리는 검푸른 바람과 콱! 마주쳐 놓니까 개자(芥子)국을 홀짝 마신 때처럼 씽! 하고 콧잔등에까지 눈물이 팽그르르 괼 뻔한다

 

바다의 난간(欄干)에서 훈장(勳章)일랑 잃어버리고 별을 뿌리며 밤의 검은 팔에 휘감기는 나를 봐라

바다에서 바람이 오더니 내 넥타이를 만져 보곤 가버린다

바람은 검은 망토를  (★★)  있구나

 

애라(愛羅)!

나는 너를 보내러 왔다 항구로 왔다.

 

□ 3.

 

해협(海峽)은 출렁거리는 한 잔(盞) 페피아민트가 아니겠니? 데크에서 한쪽 다리를 지팡이처럼 짚고 서서 푸름이 사뭇 쏟아지는 하늘에 눈이 아프도록 박혀지는 빨간 기폭(旗幅)일랑 청춘(靑春)의 도안(圖案)으로 접어 두면서 너는 아슴히 넘실거리는 수평선(水平線) 위에다 가느다란 구역질을 뱉어 놓을 게 아닌가?

 

이방(異邦) 사투리 낙엽처럼 굴러 다니는 술렁거리는 부두(埠頭)에서 신데렐라(CINDERELLA)의 빨간 비드로(VIDRO)의 장화(長靴)를 신고 나도 너를 찾아야 할 날이 올 것을 안다.

 

애라(愛羅)!

새로운 것을 위하여 승화(昇華)의 닻줄을 감자

우리들의 태양(太陽) 우리들의 신기루(蜃氣樓)를 위하여……

 

아침

파아란 기항지(寄港地)

빨간 망토의 소녀(少女)들

새로운 신사록(紳士錄)

우리들의 공화국(共和國)

펼쳐지는 지도(地圖)

기어간 산맥(山脈)들

 

나는 너를 보내러 왔다 담배를 피워물면서 흐르는 바람 속에 서 있다 자꾸만 투명(透明)해지는 나의 육체(肉體)!

 

애라(愛羅)!

 

□ 4.

 

   BARCELONA

아 BARCELONA로

 

백민, 1950. 3

 

 


 

 

조향 시인 / 붉은 달이 걸려 있는 풍경화(風景畵)

 

 

But who is that on the other side of you?

      T. S. Eliot : The Waste Land

 

가로등이 갑자기 꺼져들 가고 나면.

페이브먼트 위엔.

여름처럼 무성해 가는 붉은 독버섯들.

독버섯들은 생쥐 귀처럼 생겼다.

거기 뱀 같은 외눈들이 차갑게 꺼무럭거리고.

ꡒ좀생이 같은 놈들?ꡓ

 

외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몸뚱어릴 핥아온다.

내 몸에선 옴두꺼비의 혹이 쏙소그레 돋아나고.

모가지도 없는 붉은 망토자락의 그림자.

나는 뭬라고 연신 되뇌면서.

거리 모롱일 황급히 돌아 버린다.

 

검은 발자욱 소리가 내 뒤를 밟는다.

망토자락의 일으키는 바람이 차갑게 날 쫓아오면서.

나는 갑자기 고발(告發)당한다.

 

네거리.

아직도 분수는.

소록소록.

솟고 있는데.

 

무장(武裝)한 어휘(語彙)들을 거느리고.

계엄령(戒嚴令)이 버티고 섰다.

비둘기의 광장(廣場)엔 주검만 널려 있고.

캐스터네츠를 울리며 지나가는 누더기 곡두의 행렬.

 

돌연 엄습해 오는 아고라포비아(agoraphobia)!

 

찢어진 탬벌린 소리가 요란하고.

허탈한 웃음소리들이 한바탕 소나기지고 나면.

수많은 상실(喪失)들이 줄지어 간다.

붉은 생쥐들이 내 발뒤꿈칠 와서 갉작거린다.

 

나는.

숨이. 가쁘다.

진땀이. 흐른다.

검은.

발자욱. 소리.

ꡒ……저건. 대체. 누구냐?ꡓ

 

나는 간신히 미야(Miya)의 방문을 드윽 연다.

ꡒ얼굴이 창백하시네요!ꡓ

미야(Miya)의 방 유리창에 가서 열없이 붙어 서 본다.

세모꼴 하늘엔 바알간 달이 걸려 있고.

달은 문둥이처럼 문드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미야(Miya)는 내 손을 꼬옥 쥐면서.

ꡒ무서워요!ꡓ

 

먼 데서 총소리.

검은 고요를 뚫어 놓고. 흔들어 놓고.

아우성소리 점점 스러져 가고.

장송(葬送)의 코오러스도 들리지 않으면서.

꼭두서니빛으로 타오르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하 심심해서 달리(Dali)의 그림책이나 펼쳐 보자

 

`내란(內亂)의 예감(豫感)'

 

현대문학, 1967. 12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