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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광균 시인 / 와사등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1.

김광균 시인 /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 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추일 서정(秋日序情) 2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 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외인촌(外人村)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나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를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나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읜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소리.


와사등, 남만서고, 1939


 


 

 

김광균 시인 / 녹동 묘지에서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어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꽃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났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시인 / 향수(鄕愁)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메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플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오지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金光均, 1914.1.19 ~ 1993.11.23]  시인

1914년 개성에서 출생. 호는 우두(雨杜). 개성상업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雪夜(설야)〉 당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 출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 1989년 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