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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동환 시인 / 산 너머 남촌에는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0.

김동환 시인 / 산 너머 남촌에는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다나.

 

3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해당화, 삼천리사, 1942

 


 


 

 

김동환 시인 / 봄이 오면

 

 

1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꽃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

 

2

봄이 오면 하늘 우에 종달새 우네

종달새 우는 곳에 내 마음도 울어

나물캐기 아가씨야 저 소리 듣거든

새만 말고 이 소리도 함께 들어주

 

3

나는야 봄이 오면 그대 그리워

종달새 되어서 말붙인다오

나는야 봄이 오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꽃 되어 웃어본다오.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웃은 죄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시인 / 북청 물장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국경의 밤, 한성도서, 1924

 

 


 

 

김동환 시인 / 눈이 내리느니

 

 

북국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이 울고 북랑성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 안고 적성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국경의 밤, 한성도서, 1924

 


 

 

김동환 시인 / 강이 풀리면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삼인시가집, 삼천리사, 1929


 


 


 

김동환 [金東煥, 1901.9.21~?(납북)] 시인

1901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출생. 본관 강릉. 호 파인(巴人). 창씨명(創氏名)은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중동(中東)학교를 졸업.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과 수학.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금성(金星)》誌에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로 일컬어지는 대표작이며 동명 시집인 《국경의 밤》을 간행.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여 이광수(李光洙)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문명을 떨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로 근무. 1929년 월간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 발간. 1939년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 등을 《삼천리》에 실어 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한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신. 1950년 6 ·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음. 저서로는 『승천(昇天)하는 청춘』,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李光洙 ·朱耀翰 공저), 『해당화』 등과 그외 다수의 소설 ·평론 ·수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