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 시인 / 문명(文明)의 황무지(荒蕪地)
손을 번쩍 들면 내 앞에 와서 쌔근거리는 개쁜히 정지하는 크라이스라. 길들은 사냥개.
빽․미러 안에다 창백한 내 표정을 영상(映像)하며 주검의 거릴 내닫는다. 나는 약간 흔들린다.
죽어 쓰러진 엄마 젖무덤 파고드는 갓난애. 버려진 군화(軍靴)짝. 피 묻은 가제. 휘어진 철조. 구르는 두개골(頭蓋骨). 부서진 시계탑(時計塔). 전쟁이 쪼그리고 앉았던 광장(廣場)에는 누더기 주검들이. 탄환(彈丸) 자국 송송한 교외(郊外)의 병사(兵舍). 줄 지어 낙역(絡繹)한 제웅의 무리. 참 낙막(落寞)한 것.
유리창 바깥엔 돌아가는 지구의(地球儀). 옛날의 옛날의 나의 무랑루즈. 그 곁엔 찢어진 동화(童畵) 한 장 팔락이고. 동화(童畵) 가운데서 넌지시 포신(砲身)이 회전한다. 내 가슴을 시꺼멓게 겨냥해 온다. 이따금씩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리고 살갗엔 또야기도 돋아나고. 레스링처럼 씩씩하던 도시(都市)에는 이제. 넘어져 가는 기업(企業)들의 지붕 위를. 까마귀만 맴을 돌고.
지친 사상(思想)의 애드․바룽이 히죽이 걸려 있는 붉은 닥세리. 타다 남은 쇠층층계 황토빛 하늘을 괴고 섰는 문명(文明)의 폐허를 지나. 천둥․비바람 차장에 요란한 광야(曠野)로. 먹빛 저항(抵抗)이 치렁치렁 가로놓인다. 허줏굿 소리 자꾸만 들려 오는 여기. 아직도 운하(運河)의 언덕에선 모두들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당아씨, 어떻거고 싶지? ꡒShe answered : I would die.ꡓ 나는 죽고만 싶단다
내일을 잃은 지구(地球)엔 이윽고 까아만 막(幕) 이 나린다.
영문(嶺文), 1957. 11
조향 시인 / 밀 누름 때
밀 누름 때 하늘은 떨궈버린 행복처럼 눈이 부신데 가슴 활활 달고 등골에 땀도 송송 배는데 나는 구비치는 밀밭 머리에 섰다 섰구나! 이삭이 무르익은 냄새란 이렇게도 고소한게냐! 나는 무너져가는 청춘을 안고 계절의 한복판에서 영영 기절해 버린다
밀밭 두던 황토 사태 난 그늘에 호젓히 외로워라 하얀 오랑캐꽃 한떨기 나는 허수아비처럼 얄궂은 포―즈로 섰고 싶어라 나는 그 어느 불행히 미쳐 죽은 화가인 양 무르녹는 밀밭 머리 누른 에―텔의 파동에 취한다
푸르른 계절 그 황홀한 울고 싶은 풍경화 속에서 나는 나를 잃어 버린다 풍성히 탄력스러운 포곤한 숲 저어쪽에 바다가 호수처럼 게을음처럼 잠자코 누워 있다
간지러운 풀피리 소리에 재우쳐 깬 나는 짓궂은 소요정(小妖精)들인 양 휘파람을 날려라. 에나멜 느린 듯이 고운 하늘에 구멍이나 구멍이나 송 송 뚫어라!
죽순, 194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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