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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문명(文明)의 황무지(荒蕪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0.

조향 시인 / 문명(文明)의 황무지(荒蕪地)

 

 

손을 번쩍 들면

내 앞에 와서 쌔근거리는 개쁜히 정지하는 크라이스라. 길들은 사냥개.

 

빽․미러 안에다 창백한 내 표정을 영상(映像)하며

주검의 거릴 내닫는다. 나는 약간 흔들린다.

 

죽어 쓰러진 엄마 젖무덤 파고드는 갓난애.

버려진 군화(軍靴)짝.

피 묻은 가제.

휘어진 철조.

구르는 두개골(頭蓋骨).

부서진 시계탑(時計塔).

전쟁이 쪼그리고 앉았던 광장(廣場)에는 누더기 주검들이.

탄환(彈丸) 자국 송송한 교외(郊外)의 병사(兵舍).

줄 지어 낙역(絡繹)한 제웅의 무리.

참 낙막(落寞)한 것.

 

유리창 바깥엔 돌아가는 지구의(地球儀).

옛날의 옛날의 나의 무랑루즈.

그 곁엔 찢어진 동화(童畵) 한 장 팔락이고.

동화(童畵) 가운데서 넌지시 포신(砲身)이 회전한다.

내 가슴을 시꺼멓게 겨냥해 온다.

이따금씩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리고 살갗엔 또야기도 돋아나고.

레스링처럼 씩씩하던 도시(都市)에는 이제.

넘어져 가는 기업(企業)들의 지붕 위를.

까마귀만 맴을 돌고.

 

지친 사상(思想)의 애드․바룽이 히죽이 걸려 있는 붉은 닥세리.

타다 남은 쇠층층계 황토빛 하늘을 괴고 섰는 문명(文明)의 폐허를 지나.

천둥․비바람 차장에 요란한 광야(曠野)로.

먹빛 저항(抵抗)이 치렁치렁 가로놓인다.

허줏굿 소리 자꾸만 들려 오는 여기.

아직도 운하(運河)의 언덕에선 모두들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당아씨, 어떻거고 싶지?

ꡒShe answered : I would die.ꡓ

나는 죽고만 싶단다

 

내일을 잃은 지구(地球)엔 이윽고 까아만

막(幕)

이 나린다.

 

영문(嶺文), 1957. 11

 

 


 

 

조향 시인 / 밀 누름 때

 

 

밀 누름 때 하늘은 떨궈버린 행복처럼 눈이 부신데

가슴 활활 달고 등골에 땀도 송송 배는데

나는 구비치는 밀밭 머리에 섰다 섰구나!

이삭이 무르익은 냄새란 이렇게도 고소한게냐!

나는 무너져가는 청춘을 안고

계절의 한복판에서 영영 기절해 버린다

 

밀밭 두던 황토 사태 난 그늘에

호젓히 외로워라 하얀 오랑캐꽃 한떨기

나는 허수아비처럼 얄궂은 포―즈로 섰고 싶어라

나는 그 어느 불행히 미쳐 죽은 화가인 양

무르녹는 밀밭 머리 누른 에―텔의 파동에 취한다

 

푸르른 계절 그 황홀한 울고 싶은 풍경화 속에서

나는 나를 잃어 버린다

풍성히 탄력스러운 포곤한 숲 저어쪽에

바다가 호수처럼 게을음처럼 잠자코 누워 있다

 

간지러운 풀피리 소리에 재우쳐 깬 나는

짓궂은 소요정(小妖精)들인 양 휘파람을 날려라.

에나멜 느린 듯이 고운 하늘에

구멍이나 구멍이나 송 송 뚫어라!

 

죽순, 1947. 8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