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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대연리(大淵里) 서정(抒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9.

조향 시인 / 대연리(大淵里) 서정(抒情)

 

 

□ 1 가을

 

여기는 마구 고요만 하구나 노오란 오후의 햇볕 어깨에 받으며 신문질 그러듯이 나는 바다를 앞에 척 펴 놓고 이렇게 쓸쓸한 시간 가운데 있구나

바다는 마구 칠한 부륫샨 부류우

오 바다는 굼실거리는 영원의 그라비유어!

바다여 너는 찬란한 생명을 가졌느냐?

 

수평 건너는 외대배기 예 제 어쩌면 가버린 이 모습처럼 저리는 희미한 애달픔이냐? 바다야 나는 너의 한없이 푸르른 역사를 모른다

 

온통 코스모스가 한밤 벌떼처럼 흩어진 여기 고추잠자리 능난한 곤두박질이 긋는 선(線)을 따라만 가다가 나는 그만 짙푸른 하늘의 애정에 현기증이 나 버리곤 한단다

 

소릴 치면 메아리가 돌아올 듯이 마주 다가앉은 솔이 푸른 산 그 너머가 해운대라는구야!

 

…… 그래 은이 네가 너의 가제 결혼한 서방을 내버리고 미친 듯이 날 찾아와 눈에 이슬만 맺던 어쩌면 제법은 슬프기도 한 그 해운대의 이야길 너는 지금 어디메서 쓰다듬고 있느냐?

참으로 신기론 수수꺼끼가 아니냐 인생이란?

나는 네가 그리워라 나는 네가 그립지도 않아라

 

꾸겨질 적마다 솨아 하며 하얀 잇발들을 추껴 들고 내달아 오는 바다 이 손님도 없는 향연을 외로워란 듯이 흰 구름이 지나며 그림잘 떨어뜨려 놓는다 소년처럼 돌팔매도 쳐 보면서 돌아오다가 잔디에서 뒹구는 학생과 공연히 마주 웃었다

게으른 엿장사 가위 소리가 지나간 다음 오후의 한 나절은 옴짓 않는 고요가 뼈에 저린다

 

□ 2 봄

 

바닷물이 차츰 물러서노라면 젖은 모랫벌이 햇볕을 쬔다.

기다렸더란 듯이 조갤 호비려 달려드는 마을 가수내들 젊은 아낙네들 걷어 붙인 치마 밑에 볼통이 알밴 건강한 만져 보고도 싶은 다리 다리들에 연한 바람이 휘감긴다 홰홰 감기누나 간지럽게 감기는구나

 

이층 창 밀어 올리고 동해 푸른 바다 여인인 양 살뜰히 안아 들여 본다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발끝이 홰끈 들린다 바람이 마고 내 숨통을 막는구나

보리밭 거름 냄새 복숭아꽃 냄새 바다 냄새 남쪽 냄새 조개 잡는 아가씨 땀 냄새 살결 냄새 문주리 내 허파로 밀려 든다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 그래도 나는 연방 섰다

바람에 불리우며 이쪽으로 오는 여학생의 남빛 보레로가 눈에 스민다 그 위로 노랑 나비가 휘영휘영 하늘로 당기어 간다

 

눈이 아찔하게 노란 장다리꽃 길을 헐레벌떡 지나고 나면 복숭아도 오얏도 개나리도 버들 잎도 마구 피어 무르녹은 마을이 활짝 열린다

 

풀피리 소리가 가물어지자 송아지도 게으름을 피우면서 등골에 쪼르르 땀방울도 구르며 목구멍에 감기는 감기는 이 갈증! 봄은 갈증이냐 갈증은 봄의 행복이냐 아 포실한 이 갈증이여!

 

모자를 제껴라 이마를 솔솔 바람에다 맡긴다 내 게슴츠레 뜬 눈망울에 비최는 신작로 거기 해운대로만 달아나는 뻐스 뒤통수에 이는 뽀오얀 먼지 먼지 사라진 다음 아슴한 하늘 끝에 떠 오르는 네가 있다 참으로 있구나 십년 전의 네가 있구나 너도 이 길을 해운대로만 달렸었을 게 아니냐?

 

은아! 다시 오월 콧노래 부르던 오월 나란히 거닐던 오월이다 시간의 비석(碑石)에 아로새겨진 내 사랑의 생채기는 훈장(勳章)인 양 풍화(風化)되어 가는구나! 어쩌면 한바탕 비극 같은 게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말이다

 

영문(嶺文), 1949. 11

 

 


 

 

조향 시인 / 디멘쉬어 프리콕스의 푸르른 산수(算數)

 

 

당나귀 등에 검은 신(神)들의 모꼬지.

신데렐라의 하늘에 다갈색(茶褐色) 코러스가 번져 나가면

너는 검은 화요일을 자맥질하면서 바람과 함께 스산히 서만 있다.

무례한 송충이 가든 파티를 꾀하고

나분이 내려앉은 헬리콥터는 호랑나비과(科)에 속하는데

멀거니 서서 광야(曠野)에 붙박힌 내 귀에

소리가 야릇한 소리가 있어 소스라치는 소라들

계엄령은 검은 굵은 네모진 안경테이니라

시시하게 시시덕거리는 정치꾼들,

가는 눈 실눈을 뜨고 얄밉게 교활을 피우면

군중들의 노호(怒號)는 세종로에 촘촘하고

요긴한 까마귀들은 한천(寒天)의 오점(汚點)이다.

평생이 굴비처럼 엮어져 있는 발코니에서

생명들은 모개흥정에 바쁜데, 은방울꽃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인간은 모욕당한 강아지다.

간헐적으로 간힐이 솟구치는 디멘쉬어 프리콕스를 거느리고

의사(醫師)의 손가락을 잘라서 옥상 정원에다 심었다. 관상용(觀賞用) 식물(植物).

자자브레한 고독들이 골목 으슥한 데로 몰려드는 황혼 무렵

유럽에서는 총상(銃傷)을 입은 대통령이 바래진 연설을 되뇌고 있는데,

그를 따르던 오뚝이들은 배신을 컴퓨터 출력(出力)에서 찾고 있다.

위스키 잔 위에 위기가 윙윙거리고

해해거리는 백노(白奴)들은 백로지 가면(假面)이다.

광대들은 아직 메이컵이 끝나질 않았어.

야! 뒤통수에다 구멍을 내고 똥물을 붜 넣어 줘얄 놈들!

나를 보라! 나는 암흑(暗黑)의 십자가(十字架)다.

달이 지고 나면 모두들 층계참에 서서 울상을 짜 내면서,

몰려 오는 아우성들을 일일이 체크한다.

온도계에서 빠져 나온 온기(溫氣)들은 빙판에 쓰러져 있고

당장에 잎사귀들을 뒤집어 놓을 듯이 노대바람이 지랄을 하는데

신들린 사람들처럼 퀭한 눈으로

이상한 색깔의 하늘을 핥고들 있구나.

아슴히 사라져 가는 것은 내 안에서 몰래 빠져 나간 너의 하얀 곡두지?

이로니는

로니고 로

니는 니컬이고 니

컬은 컬컬하구나. 컬럭 컬럭. 지구가 앓고 있다.

하아프가 유혹의 계절을 쓰다듬고 있는데

게으름은 녹색으로 칠해진 캔버스다.

도로아미타불은 구겨진 웃음거리판인데

한 마리 새가 되어 조촐하게 날아가자 우리는.

마지막 정거장에서 너를야 잃으면,

그리운 새들을 위해서 나의 기도를 다듬는 나는 멀쑥한 세공사(細工師).

집집마다에 등불이 매달려 가면

짐승들은 옹기종기 달빛을 받으며 모여 앉아서

승냥이의 거머퇴퇴한 강의를 듣고 있다.

의치(義齒)는 뽑아서 목걸이로 하고

감람나무 밑에 매달린 플래스틱 다리

시늉을 해 뵐까? 짓고땡이다.

나를 밀치고 달아나는 키다리들을 비아냥거리지 말자!

받아쓰기를 잘 하는 물푸레나무는

푸른 오르가슴을 걸치고 다닌다는 것이다.

아무렴! 을축년 건방축이지!

같이 갈까 하다가 관 뒀어.

이런 멍청이 바보 청맹(靑盲)과니도 없을 거야, 쯧쯧!

뵈오려 가려다가 못 가서 기뻐요.

곤히 잠든 할렐루야를 깨우지 말도록.

해바라기는 고호의 전설을 제본중(製本中)인데

요즘은 요사스런 인충(人蟲)들이 창궐하는 계절인가 봐!

어험! 위엄을 꾸며 보는 어릿광대들이

처마 밑에서 난잡․난삽한 짓거리들을 하고 있으니 말예요.

지구의 축제일이 해반주그레하게 다가오니까 떠나도 괜찮다는 거지.

가야금 시울 소리는 청승맞기만 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니

어떻게 합니까

요다각형(凹多角形) 같은 거지요 뭐!

 

……………

 

전환, 1982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