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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녹색(綠色) 의자(椅子)가 앉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8.

조향 시인 / 녹색(綠色) 의자(椅子)가 앉아...

원제 : 녹색(綠色) 의자(椅子)가 앉아 있는 베란다에서

 

 

찐득찐득하다

진한 내출혈(內出血)․커피 냄새

밤이 뭉게뭉게 내 입

에서 기어나온다

   나의 여백(餘白)이 까아맣게

                     침몰(沈沒)해 간다

이끼가 번성하는 계절

늪지대(地帶)에는 송장

                     들의 눅눅한 향연

파충류(爬蟲類)와 동침하는 여인(女人)들의 머리

황혼 짙어 가는 스카이

                     라인에 비둘기떼만

하야니 박혀박혀박혀 가고가고

너도 아닌 나도 아닌

                   저 검은 그림자는

누구냐!

올빼미의 것처럼 횟가루 벽에 박히는

                                 두 눈

점점 클로즈업 되어 오는 것

이윽고는 점점 멸형(滅形)되어 가는 저것

그 언덕길

         오리나무 수우(樹雨) 듣[滴]는 소리

마구 풀냄새도 풍기더니․ 향수(鄕愁)야

네바다이 우글거리는

                   뒷골목에서

기적 소리가 나면

어디론지 떠나야 하는

                  유령

들이 술렁거린다

가만히 입을 쪽! 맞춰 줄라치면

뽀오얗게

      눈을

        흘기

          면서

`깍쟁이!' 하더니 너는 지금

빈 자리에 너의 투명한 것만 남겨

                               놓고

녹색(綠色) 의자(椅子)가 앉아 있는 나의

  베

  란

  다

에서 동화(童話)의 주인공이 들어갔

                             다는 죽음의

돌문을 바라보고 나는 있다

삶의 뒤란에서 죽음들은 하아얀

수의를 입고 놀고는 있다

낙엽이

  장

고요를

    가로

       지른

           다

 

자유문학, 1957. 12

 

 


 

 

조향 시인 / 녹색(綠色)의 지층(地層)

 

 

나뭇가지를 간지르고 가는 상냥한 푸른 바람 소리도 들리고. 거기에 섞여드는 소녀의 한숨 소리 계집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소리가소리가. 나는 사람들과 화안한 웃음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무던히는 그립다.

 

내 머리 위로 지나간 검은 직선(直線) 위엔 짙은 세삐아의 밤이 타악 자빠져 있는데. 그 밑창에 가서 비둘기들은 목을 뽑아 거머테테한 임종(臨終)을 마련하고 있다. 참 많기도 한 세삐아 빛 밤밤밤밤. 밤의 꾸부러진 지평선엔 바아미리온이 곱게 탄다. 그럼. 너는 까아만 밤에만 내 앞에서 피는 하아얀 사보텐 꽃이다. 참 아무도 없는 밤의 저변(底邊)에서. 메키시코의 사막 지대, 너와 나와 사보텐 꽃과. 행복한가? 그럼요!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밑에서 이렇게 당신이 내 곁에 누어 있고. 그럼요! 비쥬! 너는 박꽃처럼 밤을 웃는다.

 

특호(特號) 활자(活字)를 위하여. 오오. 오오. 디엔․비엔․푸우. 수상(首相)들의 비장(非壯)한 연설. 전파(電波). 파아란 전파(電波)가 지구(地球)에 마구 휘감긴다. 가이가 계기(計器)는 파업한다. 애인(愛人)들은 바닷가에 있다. 엘시노아의 파도 소리. . 끊임 없이 회상(回想)의 시제(時制)가 맴을 도는 여기. 녹색(綠色)의 지층(地層)에서. 화석(化石)이 되어 버린 나는 아아라한 고대(古代)처럼 잠자고 있다. 있어야 한다. 나는 영원을 산다. 개울 물 소리.

 

자유문학, 1956. 6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