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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야제조(夜啼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8.

노천명 시인 / 야제조(夜啼鳥)

 

 

낙옆을 가져다 내 창가에 끼얹고는

말없이 찬 달 아래 떨고 서 있는

네 마음을 알아듣는 까닭에

이 밤에 내가 굳이 창장(窓帳)을 내리웠노라

 

밤새가 네 가슴을 쪼(啄)지 않느냐

슬픈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

 

조각달이 네 메마른 팔 위에 차가웁고

16세 소녀인양 이처럼 감상적인 저녁엔

차를 끓이는 대신

과자의 은빛 종이를 벗기기로 했다

 

 


 

 

노천명 시인 / 여심

 

 

새벽 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가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달래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 하소서

 

한번의 눈짓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나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 하소서

 

즐거울 때 꽃처럼 활짝웃음으로

웃을줄아는 웃을 수 있는

슬프면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수 있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 하소서

 

주어진 길에 순종할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 드릴 수 있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 하소서

 

 


 

 

노천명 시인 / 오월의 노래

 

 

보리는 그 윤기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숲 사이 철쭉이 이제 가슴을 열었다

 

아름다운 전설을 찿아

사슴은 화려한 고독을 씹으며

불로초 같은 오시(午時)의 생각은 오늘도 달린다

 

부르다 목은 쉬어

산에 메아리만 하는 이름----

 

더불어 꽃길을 걸을 날은 언제뇨

하늘은 푸르러서 더 넓고

마지막 장미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라

그리고 폭풍이 불어다오

이 오월의 한낮을 나 그냥 갈 수는 없어라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꽃꽃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 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을을 접어 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돌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 하겠오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盧天命, 1912.9.2∼1957.12.10]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