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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그날의 신기루(蜃氣樓)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7.

조향 시인 / 그날의 신기루(蜃氣樓)

 

 

형장(刑場) 검은 벌판.

쭈빗쭈빗이 늘어선 말목에 턱 괴고

붉은 달은 야릇이 웃었더니라.

귀곡(鬼哭)은 수수(愁愁)

기인 그리매들만 일렁였고.

 

우리 외삼촌의 콧날을 날려 놓고

펄럭이는 3․1의 깃발 꿰뚫어 놓고

서른 아홉 층층계를 굴러서

여기 내 앞에 동댕이쳐지는 총알.

한 개.

기기기기기기(旗旗旗旗旗旗)이천만개(二千萬個)가기기기인(旗旗旗人)마다기기기(旗旗旗)방촌(方寸)의인(刃)을회(懷)하고기기기(旗旗旗)

천백세조령(千百歲祖靈)이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旗旗旗旗旗旗旗旗旗旗旗)오등(吾等)을음우(陰佑)하며기기기기기(旗旗旗旗旗)

 

조선건국(朝鮮建國)사천이백오십이년(四千貳百五十貳年) 삼월일일(參月壹日)

 

피의 이끼 만발한 층층계 자꾸 올라가면

우리 모두의 마음의 하늘에 의젓한

그날의 신기루(蜃氣樓).

왁자악히 만세(萬歲) 소리만 쏟아지면서.

탄피(彈皮). 두개골(頭蓋骨). 또 외삼촌의 코가 떨어져 있고.

귀한 눈알들이 조선(朝鮮)의 하늘 우러르며 누워 있다. 피. 주검 겨레.

 

나도 너도 길이는 괼 3․1의 탑(塔).

꼭대기에.

훨훨 비둘기떼 오늘을 날고.

흰 구름 탑 허리에 감기며.

소년들. 하얀 장미꽃다발. 합장(合掌).

창가(唱歌) 소리. 만세 소리.

탑 너머 아아라히 깔려 있는 샛파란.

하늘. 하늘. 하늘.

 

고려(高麗)의 빛깔이다.

청자(靑磁)빛 우리 하늘 아래.

언제나 살아 있는 것.

맥맥(脈脈)히 영원히 흐르는 줄기.

하나만 하나만 있다.

 

자유문학, 1958. 4

 

 


 

 

조향 시인 / 나는야 뱃사공

 

 

나는야 뱃사공

어제도 오늘도 배움의 강 건너주는

나는야 뱃사공

어기어차 나룻배 사공이다!

 

이 언덕에 날 찾아온 그대들을

지혜의 노를 저어 수울렁 배를 띄워

 

저어쪽 언덕에 넘겨주곤 다시 돌아오는

나는야 뱃사공

어기어차 나룻배 사공이다!

 

동으로 서으로 헤쳐지는 그대들의 뒷모양

바라보며 돌아보며

잘 가라고 잘 되라고 비는 사람

나는야 뱃사공

어기어차 나룻배 사공이다!

 

조선교육, 1947. 9

 

 


 

 

조향 시인 / 날아라 구천에

 

 

학이드냐 봉이드냐

너희들 날아라 구천 그 높은 위에

눈부시는 눈이 부시는 궁궐 향해서

나의 너희들 높다랗게 날라도 보라!

머얼리 옛집 돌아보며 내려다보며

맑은 은하 건너 너희들 가는 곳 알고지라!

허구 많은 나라에도 배달의 피를 받아 태어난 젊은 너희들

가는 곳 진정 알고도지라!

구름 첩첩으로 머흘어도 뚫어라

빗줄기 거칠게 쏟아져도 참아얀다.

헝클어진 이 나라 바로잡고 겨레 위하여

젊은 너희들 피 끓어 올라라 곱게 고웁게……

학이드냐 봉이드냐

날아라 너희들 구천 그 높다란 위에 싸움 없고 모자람도

없는 터전 닦으러 하얀 빨간 장미꽃 송이 송이

사철로 필 줄 아는 그런 나라 세우러 나의 너희들 구만리

창공 끝없이 날아라 날아보자!

 

조선교육, 1947. 9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