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 시인 / 그날의 신기루(蜃氣樓)
형장(刑場) 검은 벌판. 쭈빗쭈빗이 늘어선 말목에 턱 괴고 붉은 달은 야릇이 웃었더니라. 귀곡(鬼哭)은 수수(愁愁) 기인 그리매들만 일렁였고.
우리 외삼촌의 콧날을 날려 놓고 펄럭이는 3․1의 깃발 꿰뚫어 놓고 서른 아홉 층층계를 굴러서 여기 내 앞에 동댕이쳐지는 총알. 한 개. 기기기기기기(旗旗旗旗旗旗)이천만개(二千萬個)가기기기인(旗旗旗人)마다기기기(旗旗旗)방촌(方寸)의인(刃)을회(懷)하고기기기(旗旗旗) 천백세조령(千百歲祖靈)이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旗旗旗旗旗旗旗旗旗旗旗)오등(吾等)을음우(陰佑)하며기기기기기(旗旗旗旗旗)
조선건국(朝鮮建國)사천이백오십이년(四千貳百五十貳年) 삼월일일(參月壹日)
피의 이끼 만발한 층층계 자꾸 올라가면 우리 모두의 마음의 하늘에 의젓한 그날의 신기루(蜃氣樓). 왁자악히 만세(萬歲) 소리만 쏟아지면서. 탄피(彈皮). 두개골(頭蓋骨). 또 외삼촌의 코가 떨어져 있고. 귀한 눈알들이 조선(朝鮮)의 하늘 우러르며 누워 있다. 피. 주검 겨레.
나도 너도 길이는 괼 3․1의 탑(塔). 꼭대기에. 훨훨 비둘기떼 오늘을 날고. 흰 구름 탑 허리에 감기며. 소년들. 하얀 장미꽃다발. 합장(合掌). 창가(唱歌) 소리. 만세 소리. 탑 너머 아아라히 깔려 있는 샛파란. 하늘. 하늘. 하늘.
고려(高麗)의 빛깔이다. 청자(靑磁)빛 우리 하늘 아래. 언제나 살아 있는 것. 맥맥(脈脈)히 영원히 흐르는 줄기. 하나만 하나만 있다.
자유문학, 1958. 4
조향 시인 / 나는야 뱃사공
나는야 뱃사공 어제도 오늘도 배움의 강 건너주는 나는야 뱃사공 어기어차 나룻배 사공이다!
이 언덕에 날 찾아온 그대들을 지혜의 노를 저어 수울렁 배를 띄워
저어쪽 언덕에 넘겨주곤 다시 돌아오는 나는야 뱃사공 어기어차 나룻배 사공이다!
동으로 서으로 헤쳐지는 그대들의 뒷모양 바라보며 돌아보며 잘 가라고 잘 되라고 비는 사람 나는야 뱃사공 어기어차 나룻배 사공이다!
조선교육, 1947. 9
조향 시인 / 날아라 구천에
학이드냐 봉이드냐 너희들 날아라 구천 그 높은 위에 눈부시는 눈이 부시는 궁궐 향해서 나의 너희들 높다랗게 날라도 보라! 머얼리 옛집 돌아보며 내려다보며 맑은 은하 건너 너희들 가는 곳 알고지라! 허구 많은 나라에도 배달의 피를 받아 태어난 젊은 너희들 가는 곳 진정 알고도지라! 구름 첩첩으로 머흘어도 뚫어라 빗줄기 거칠게 쏟아져도 참아얀다. 헝클어진 이 나라 바로잡고 겨레 위하여 젊은 너희들 피 끓어 올라라 곱게 고웁게…… 학이드냐 봉이드냐 날아라 너희들 구천 그 높다란 위에 싸움 없고 모자람도 없는 터전 닦으러 하얀 빨간 장미꽃 송이 송이 사철로 필 줄 아는 그런 나라 세우러 나의 너희들 구만리 창공 끝없이 날아라 날아보자!
조선교육, 194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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