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찿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 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노천명 시인 / 바다에의 향수
기억에 잠긴 남빛 바다는 아드윽 하고 이를 그리는 정열은 걷잡지 못한 채 낯선 하늘 머언 뭍 우에서 오늘도 떠가는 구름으로 마음을 달래보다
지금쯤 바다 저편엔 칠월의 태양이 물 우에 빛나고 기인 항해에 지친 배의 육중스런 몸뚱이는 집시--의 퇴색한 꿈을 안고 푸른 요 우에 뒹굴며 닟익은 섬들의 기억을 뒤적거리며........
푸른 밭을 갈아 흰 이랑을 뒤에 남기며 장엄한 출범은 이 아침에도 있었으리........ 늠실거리는 파도---바다의 호흡---흰물새--- 오늘도 내 마음을 차지하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처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것이 나의 무엇입니까 술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처다보며 걸어갑시다.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비련송(悲戀頌)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 못엔 오늘도 탑 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구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성묘
어찌타 가시는 님 정(精)은 남겨 두신고 가배절(嘉排節) 당하오니 옛설움 새로워라
쓰린 마음 굳이 안고 누우신 곳 찿았건만 애닯다 어이 몰라 하신고 키 큰 풀 우거진 양 더욱 쓸쓸하고야
간장에 맺힌 설움 풀 길이 바이 없어 더운 눈물 뿌려 마른 잎을 축이노라
온 것조차 모르시니 애닯은 이 마음이랴
눈 들어 먼 산 보니 안개 어이 가리는고 발밑의 흰 떨기도 눈물 젖어 있더라
산호림, 자가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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