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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묘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7.

노천명 시인 /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찿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 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노천명 시인 / 바다에의 향수

 

 

기억에 잠긴 남빛 바다는 아드윽 하고

이를 그리는 정열은 걷잡지 못한 채

낯선 하늘 머언 뭍 우에서

오늘도 떠가는 구름으로 마음을 달래보다

 

지금쯤 바다 저편엔 칠월의 태양이 물 우에 빛나고

기인 항해에 지친 배의 육중스런 몸뚱이는

집시--의 퇴색한 꿈을 안고 푸른 요 우에 뒹굴며

닟익은 섬들의 기억을 뒤적거리며........

 

푸른 밭을 갈아 흰 이랑을 뒤에 남기며

장엄한 출범은 이 아침에도 있었으리........

늠실거리는 파도---바다의 호흡---흰물새---

오늘도 내 마음을 차지하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처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것이 나의 무엇입니까


술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처다보며 걸어갑시다.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비련송(悲戀頌)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 못엔 오늘도 탑 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구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성묘

 

 

어찌타 가시는 님

정(精)은 남겨 두신고

가배절(嘉排節) 당하오니

옛설움 새로워라

 

쓰린 마음 굳이 안고

누우신 곳 찿았건만

애닯다 어이 몰라 하신고


키 큰 풀 우거진 양

더욱 쓸쓸하고야

 

간장에 맺힌 설움

풀 길이 바이 없어

더운 눈물 뿌려

마른 잎을 축이노라

 

온 것조차 모르시니

애닯은 이 마음이랴

 

눈 들어 먼 산 보니

안개 어이 가리는고

발밑의 흰 떨기도

눈물 젖어 있더라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盧天命, 1912.9.2∼1957.12.10]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