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노천명 시인 / 작별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은 눈보라가 날렸다
언니는 흰 족도리를 쓰고 오라버니는 굴관을 하고 나는 흰 댕기 늘인 삼또아리를 쓰고
상여가 동리를 보구 하직하는 마지막 절하는 걸 봐도 나는 도무지 어머니가 아주 가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키를 하고 산엘 갔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나는 어머니가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노천명 시인 /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20리를 걸어 열하룻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말내딸 이뿐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와지면 이뿐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추풍(秋風)에 부치는 노래
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어옵니다. 신이 몰아오는 빈 마차소리가 들려옵니다. 웬일입니까 내가슴이 써-늘하게 샅샅이 얼어듭니다.
인생은 짧다고 실없이 옮겨 본 노릇이 오늘아침 이말은 내가슴에다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을 추설 수가 없습니다.
황혼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섭니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날들입니다. 어쩌면 청춘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연인들이여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은듯이 지나 버리는 생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꽃밭을 그대 만나거든 마음대로 앉아 노니다 가시오 남이야 뭐라든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밤을 도와 하게 하시오
총기(聰氣)는 늘 지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금싸라기 같은 날들이 하루하루 없어집니다. 이것을 잠가둘 상아궤짝도 아무것도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낙엽이 내 창을 두드립니다. 차 시간을 놓친 손님모양 당황합니다. 어쩌자고 신은 오늘이사 내게 청춘을 이렇듯 찬란하게 펴 보이십니까.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노천명 시인 / 푸른 오월(五月)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 塔 위에 그린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女人네 맵시 위에 감미(甘味)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季節)의 女王 五月의 푸른 여신(女神)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鄕愁)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香水)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친다.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에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五月의 창공(蒼空)이여! 나의 태양(太陽)이여!
창변, 매일신보사,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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