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시인 /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시인 / 포구(浦口)
슬픔이 영원(永遠)해
사주(砂洲)의 물결은 깨어지고 묘막(杳漠)한 하늘 아래
고(告)할 곳 없는 여정(旅情)이 고달퍼라.
눈을 감으니 시각(視覺)이 끊이는 곳에 추억이 더욱 가엾고
깜박이는 두 셋 등잔 아래엔 무슨 단란(團欒)의 실마리가 풀리는지......
별이 없어 더 서러운 포구(浦口)의 밤이 샌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시인 / 반딧불
너는 정밀(靜謐)의 등촉(燈燭)
신부(新婦)없는 동방(洞房)에 잠그리라.
부러워하는 이도 없을 너를
상징(象徵)해 왜 내 맘을 빚었던지
헛고대의 밤이 가면
설운 새 아침 가만히 네 불꽃은 꺼진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시인 / 나
나를 반겨함인가 하여 꽃송이에 입을 맞추면
전율(戰慄)할 만치 그 촉감(觸感)은 싸늘해-
품에 있는 그대로
이해(理解) 저편에 있기로 '나'를 찾았을까?
그러나 기억(記憶)과 망각(忘却)의 거리
명멸(明滅)하는 수(數)없는 `나'의
어느 '나'가 '나'뇨.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시인 / 물고기 하나
웅덩이에 헤엄치는 물고기 하나 그는 호젓한 내 심사(心思)에 걸렸다.
돍새 너겁 밑을 갸웃거린들 지난 밤 져버린 달빛이 허무(虛無)로히 여직 비칠리야 있겠니? 지금 너는 또 다른 웅덩이로 길을 떠나노니 나그네 될 운명(運命)이 영원(永遠) 끝날 수 없는 까닭이냐.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시인 / 태풍(颱風)
죽음의 밤을 어질르고 문(門)을 두드려 너는 나를 깨웠다.
어지러운 명마(兵馬)의 구치(驅馳) 창검(槍劍)의 맞부딪힘, 폭발(爆發), 돌격(突擊)! 아아 저 포효(泡哮)와 섬광(閃光)!
교란(攪亂)과 혼돈(混沌)의 주재(主宰)여 꺾이고 부서지고, 날리고 몰려와 안일(安逸)을 항락(享樂)하는 질서(秩序)는 깨진다.
새싹 자라날 터를 앗어 보수(保守)와 조애(阻碍)의 추명(醜名) 자취(自取)하든
어느 뫼의 썩은 등걸을 꺾고 온 길이냐.
풀 뿌리, 나뭇잎, 뭇 오예(汚穢)로 덮인 어느 항만(港灣)을 비질하여
질식(窒息)에 숨지려는 물결을 일깨우고 온 길이냐.
어느 진흙 쌓인 구렁에 소낙비 쏟아 부어 중압(重壓)에 울던 단 샘물 웃겨 주고 온 길이냐.
파괴(破壞)의 폭군(暴君)!
그러나 세척(洗滌)과 갱신(更新)의 역군(役軍)아, 세차게 팔을 둘러 허섭쓰레기의 퇴적(堆積)을 쓸어 가라.
상인(霜刃)으로 심장(心臟)을 헤쳐
사특, 오만(傲慢), 미온(微溫), 순준(巡逡) 에어 버리면
순진(純眞)과 결백(潔白)에 빛나는 넋이 구슬처럼 새 아침이 빛나기도 하려니.
망향, 문장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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