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 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읍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 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이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날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고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오는 검은 치마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 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촛불, 인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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