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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5.

신석정 시인 /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 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읍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 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이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날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시인 /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고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오는 검은 치마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 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촛불, 인문사, 1939

 

 


 

신석정  [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 ·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