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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화사(花蛇)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5.

서정주 시인 /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서정주 시인 / 국화 옆에서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 시인 /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三萬里).

 

신이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 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 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육날 메투리: 육날 메투리는, 신 중에서는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신발이었다. 귀촉도는,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 그런 발음(發音)으로써 우는 것이라고 지하(地下)에 돌아간 우리들의 조상(祖上)의 때부터 들어온 데서 생긴 말씀이다.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작자(作者)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