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시초>(1957)-
김현승 시인 / 눈물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초>(1957)-
김현승 시인 / 사월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 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 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 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水仙)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 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解凍)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어딘가 미신(迷信)의 달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절대 고독>(1970) -
김현승 시인 / 양심의 금속성
모든 것은 나의 안에서 물과 피로 육체를 이루어 가도
너의 밝은 은(銀)빛은 모나고 분쇄(粉碎)되지 않아
드디어 무형(無形)하리만큼 부드러운 나의 꿈과 사랑과 나의 비밀을 살에 박힌 파편(破片)처럼 쉬지 않고 찌른다.
모든 것은 연소되고 취(醉)하여 등불을 향하여도, 너만은 물러나와 호올로 눈물을 맺는 밤
너의 차가운 금속성(金屬性)으로 오늘의 무기를 다져 가도 좋을,
그것은 가장 동지적(同志的)이고 격렬한 싸움!
김현승 시인 / 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 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견고한 고독>(1968)-
김현승 시인 /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초하호>(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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