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시인 / 산천에 묻노라
나는 산천에 물어 보노라, 오랜 세월, 뭉쳤던 한숨을 안개같이 풍겨 보노라.
기름진 땅, 주렁주렁 곡식은 여물건만, 헐벗은 이 나라 사람이 굶어 죽고, 얼어 죽어도, 예사로 아는지 모르는지 산천에 물어 보노라.
우리는 소가 아니오 문화를 사랑하고 지어내는 민족이외다. 노름도 안 했건만 우리의 산천을 빼앗긴 가난한 주인이외다.
누구에게 호소해보지도 못하고, 빈 방안 벽을 보고도 외쳐보지 못하던 오직 금단(禁斷)의 세월이기에, 내 머리에서 가슴 속으로 다만 오락가락 불심지가 달았을 뿐이오.
산이 아름답고 크면 무엇하며 바다가 푸르고 깊으며 무엇하리, 산의 짐승도 바다의 물고기도, 이 나라 모든 생물이란, 간악한 놈들이 있기에 억울한 죽음을 하였소.
그러나 우리들의 불끓는 투사는 가도 또 오고, 언제나 이 산천을 좀 먹던 자와 싸웠소, 피를 흘리며 싸웠소. 하늘의 벽력같이, 땅의 지동(地動)같이, 나라를 살리는 얼이었소.
이제는 오랜 세월, 귓전을 울리던 악마의 주문도 날아가고, 휘두르던 장검도 부러졌소.
나는 이대로는 정말 못 있겠소, 그리하여 미칠 듯이 기뻐서 소리를 쳤소, 오! 자유다, 이젠 영원히 해방이다.
깃발은 물결처럼, 독립 만세 소린 폭풍같이 이 나라의 천지를 흔들건만, 아는지 모르는지 다만 산천은 잠잠하니 웬일이오.
오! 잠잠한 산천이여! 묻노니 그러면 또 무엇을 기다리오. 아직도 이 땅엔 같은 민족을 좀먹는 자(者)들이 탈을 쓰고 끼여 있어, 새 건설을 헤살 노는 걸 당신도 아마 알고 있나보오.
그러면 우리는 기어코 물리치리다, 인민의 행복과 새 건설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무찌르리다.
오!! 산천이여 묻노니 그러면 그때는 대답을 하려오.
인민, 1946. 1
박세영 시인 / 산촌의 어머니
산촌의 어머니, 날이 춥습니다, 바람은 칼날같이 불고, 으르렁거릴 때, 그곳인들 오죽 치웁겠습니까? 어머니! 이럴 때마다, 나의 마음은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그곳으로 달려가집니다.
옛이야기의 할먼네집 같은 저―산촌의 나의 집이여, 어머니는 지금 덜덜 떨고 계시겠지! 다―늙으신 몸이 오죽 괴로우시리까.
세 낱의 아들이 말똥말똥 살았는데도, 재롱을 부리는 사랑스런 손주들이 열이나 넘는데도, 어머니는 다만 산촌에 계서 쓸쓸히도 이 날을 보내십니까. 생각하면 저희 형제는 못난 놈들이외다, 늙으신 어머니를 산골에 내버려 두어 굽으신 허리는 활등처럼 더 굽어 하늘을 보지 못하오니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야 됩니까.
일흔이 넘으신 어머니, 그 어두우신 눈으로, 깊은 밤까지 남편의 버선을 기워야 되고, 손수 밥을 끓여야 되옵니까? 콧물을 씻으시는, 동태 같은 어머니 손이여, 이 못난 자식을 때려주소서.
이 자식은 십년 째나 늙으신 어머니를 속였음이나 무에 다르오리까 해마다 올해는 편안히 모시겠다는 그 말을, 그러나 나의 어머니여, 이 땅의 가난한 어머니들이여 불쌍하외다.
눈 날리는 거리에는 여우목도리를 두른 아낙네들이 수없이 오고가는데, 비단옷에 향그러운 꽃 같은 아낙네들이 지나가는데, 어머니는 산촌에서 뜻뜻이도 못 입으시고, `고려장'의 살림을 하시나이까, 가슴이 미어지고 서글프외다. 아―산촌의 어머니여!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서울의 부감도(俯瞰圖)
서울은 서글프고나 철갑을 둘렀다는 남산(南山)의 소나무들도 간 곳이 어드메냐 병풍같이 둘린 산이 산마다 중 이마 같고나.
서울은 거칠고나 한때는 왜놈들을 덩그렇게 살리더니 지금은 팔도에서 쫓겨난 반역자들의 안식처가 되다니
팔은 것은 양심이요 얻은 것은 돈과 지위라고 외치는 자만이 그리고 물욕에만 미친 자들이 활갯짓하는 서울이여! 얼마나 가려느냐.
추울세라 따뜻한 골방에서 왜놈은 길러줘도, 고국(故國)이라 찾아온 동포들은 갈 곳 없어 한데서 잠자거니 칠칠한 놈들의 집 누가 다―들었느냐.
아! 따분한 서울이여! 울상을 거두라, 아직도 거만하게 서울을 내려다보는, 남산의 저 귀신집들이 허물어지는 날 이제 명랑한 새 날이 오리니.
신문학, 194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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