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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수영 시인 / PLASTER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7.

김수영 시인 / PLASTER

 

 

나의 천성(天性)은 깨어졌다

더러운 붓끝에서 흔들리는 오욕(汚辱)

바다보다 아름다운 세월(歲月)을 건너와서

나는 태양을 주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런 것이 올 줄이야

괴물(怪物)이여

 

지금 고갈 시인(詩人)의 절정(絶頂)에 서서

 

이름도 모르는 뼈와 뼈

어디까지나 뒤퉁그러져 나왔구나

―그것을 내가 아는 가장 비참(悲慘)한 친구(親舊)가 붙이고 간 명칭(名稱)으로

나는 정리(整理)하고 있는가

 

나의 명예(名譽)는 부서졌다

비 대신 황사(黃砂)가 퍼붓는 하늘 아래

누가 지어논 무덤이냐

그러나 그 속에서 부패하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앙상한 생명(生命)

PLASTER가 연상(燃上)하는 냄새가 이러할 것이다

 

오욕(汚辱)․뼈․PLASTER․뼈․뼈

뼈․뼈………………………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김수영 시인 / VOGUE야

 

 

VOGUE야 넌 잡지(雜誌)가 아냐

섹스도 아냐 유물론(唯物論)도 아냐 선망(羨望)조차도

아냐―선망(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선망(羨望)도 아냐

 

마룻바닥에 깐 비니루 장판에 구공탄을 떨어뜨려

탄 자국, 내 구두에 묻은 흙, 변두리의 진흙,

그런 가슴의 죽음의 표식만을 지켜온,

밑바닥만을 보아온, 빈곤에 마비된 눈에

하늘을 가리켜주는 잡지

VOGUE야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 위에 또하나

넓은 자리가 있었던 것을 자식한테

가르쳐주지 않은 죄―그 죄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몰랐다

VOGUE야 너의 세계에 스크린을 친 죄,

아이들의 눈을 막은 죄 ― 그 죄의 앙갚음

VOGUE야

 

그리고 아들아 나는 아직도 너에게 할 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안 한다

안 하기로 했다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에게도 엄마에게도 모든

아버지보다 돈많은 사람들에게도

아버지 자신에게도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김수영 시인 /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書籍)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書籍)이 있다

이것은 먼 바다를 건너온

용이(容易)하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온 것이다

주변없는 사람이 만져서는 아니될 책(冊)

만지면은 죽어버릴듯 말듯 되는 책(冊)

가리포루니아라는 곳에서 온 것만은

확실(確實)하지만 누가 지은 것인줄도 모르는

제이차대전 (第二次大戰) 이후(以後)의

긴긴 역사(歷史)를 갖춘 것같은

이 엄연(嚴然)한 책(冊)이

지금 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다

어린 동생들과의 잡담(雜談)도 마치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괴로운 잠을

이루울 준비(準備)를 해야 할 이 시간(時間)에

괴로움도 모르고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

그저 멀리 보고 있는 듯한 것이 타당(妥當)한 것이므로

나는 괴롭다

오오 그와 같이 이 서적(書籍)은 있다

그 책장(冊張)은 번쩍이고

연해 나는 괴로움으로 어찌할 수 없이

이를 깨물고 있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書籍)이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書籍)이여.

 

민성 40, 1949

 

 


 

 

김수영 시인 / 가옥찬가(家屋讚歌)

 

 

무더운 자연 속에서

검은 손과 발에 마구 상처를 입고 와서

병든 사자(獅子)처럼

벌거벗고 지내는

나는 여름

 

석간(夕刊)에 폭풍경보(暴風警報)를 보고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습관(習慣)에서가 아니라 염려하고

삼 년 전(三年前)에 심은 버드나무의 악마(惡魔) 같은

그림자가 뿜는 아우성소리를 들으며

 

집과 문명(文明)을 새삼스럽게

즐거워하고 또 비판(批判)한다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바람에서

느끼는 투지(鬪志)와 애정(愛情)은 젊다

 

자연(自然)을 보지 않고 자연(自然)을 사랑하라

목가(牧歌)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폭풍(暴風)의 목가(牧歌)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목사(牧師)여 정치가(政治家)여 상인(商人)이여 노동자(勞動者)여

실직자(失職者)여 방랑자(放浪者)여

그리고 나와 같은 집없는 걸인(乞人)이여

집이 여기에 있다고 외쳐라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검은 바람이 들어온다고 외쳐라

너의 머리 위에

너의 몸을 반쯤 가려주는 길고

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

 

킴淪堀뿌리, 민음사, 1974

 

 


 

김수영 [金洙暎, 1921. 11. 27 ~ 1968. 6. 16] 시인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 1946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하였으나 중퇴. 1946년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 <廟庭(묘정)의 노래>를 실으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으나, 1968년 6월 15일 밤 교통사고로 사망. 사후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 , 『사랑의 변주곡』(1988) 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등과 1981년 『김수영전집』 간행됨. 2001년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 추서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