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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연 시인 / 대기 뒤 장막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1.

 

정다연 시인 / 대기 뒤 장막

 

 

내가 전선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는 동안 마지막 남은 웅덩이에 잠을 자던 물소의 숨이 끊어집니다

 

들끓는 파리 떼, 어디서든 입 벌리고 있는 죽음의 아가리 너의 실체는 부패뿐이라는 듯이 독을 품고 한 번의 상처입힘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건기입니다

 

내 몸을 마비시키는 독은 어디서 왔는가 문장이 되지 못한 진흙이 뚝뚝 흘러내리는 엉망이 된 페이지 앞입니다 닦을수록 모호해지는 언어의 풍경, 창문 밖 세계

 

내가 나의 썩음을 담보로 전선을 찾기 위해 나의 교실을 가족을 국가를 나의 지대를 멱살 잡는 동안 셀 수 없이 쪼개지는 얼굴, 바스라지는 눈동자, 어둠을 휘젓던 손은

 

몽타주 한 장 들고 나오지 못하고

 

급류입니다 한 방울의 물방울만으도 익사할 수 있는 생명이 휩쓸려갑니다 언제나 가장 여린 살갗이 먼저입니다 들끊는 물기포, 각막이 터집니다

 

전선이 형성되지 않는 건기입니다

 

페이지마다 칼금을 내리꽂는 이 건기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 손등에 닿는 이 미세한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이 몸은 무엇입니까 유골들이 모래처럼 쏟아져 내리는, 한 포기의 푸름도 허락되지 않는 건기입니다

 

나는 물소의 숨이 끊어진 마지막 웅덩이에 누워 대기를 뚫고 내게 거대한 주먹을 내밀고 있는 한 손을 봅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봅니다

 

대기의 장막 뒤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저 거대한 주먹, 그 뒤에서 빛을 내리꽂고 있는 저 가짜 전선은 무엇입니까 실체가 있으면서도 실체가 없는 저 전선은 무엇입니까 강렬한 빛으로 내 눈을 멀게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저 빛은 무엇입니까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눈먼 사람이었습니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을, 있다고 있다고 부서지는 진흙으로 씁니다 부수어지는 손목으로, 흘러내리는 문장으로 씁니다 안개로도 설명되지 않는 저 빛을 씁니다 작렬하는 빛을 온몸으로 밀어내며 끊임없이 반사하여 싸워냅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전선이 그물망처럼 온몸을 묶어내고 있습니다 계절을 마음대로 바꾸고 사람들을 포획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 초에 한 번씩 전사했다 일어납니다 무릎을 세우고 내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저 거대한 주먹을, 봅니다 씁니다 나는 일 초에 한 번씩 살아내고 있습니다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빛에 무감각해진 나의 두 눈을 버리고, 나의 작은 두 주먹을 쥐고

 

월간 『현대문학』 2017년 7월호 발표

 

 


 

정다연 시인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