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숙 시인 / 한하운을 읽는 밤
1.
1987년 발간된 단행본이다. 오래되고 얇은 보리피리다. 초록은 짙고 해당화꽃잎이 바람에 부서지는 남도(南島), 그러나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는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는 가고 없는 시인의 고백에는 그가 방랑한 몇 바퀴의 산하(山河)가 있다. 누덕진 옷에 깡통을 든 삽화가 고백보다 더 처절한 자화상인, 그러나 황톳길 넘어가는 저녁놀은 장이 뒤집힐 만큼 붉고 곱기만 한데 머리를 긁다보니 간밤 얼었던 손가락 한 마디가 툭 떨어져 나가더라는 남자 살아내는 일이 이토록 높고 슬픈가. 나는 떨어져나가지도 않은 내 손 마디를 움켜잡고 지혈하며 바닥에 고인 한 슬픔의 빛깔을 들추어 읽는다.
2.
남자는 얼어 떨어진 손가락 마디를 주워들고 아직도 어느 산하를 떠도는지.
3.
황톳길 너머 노을이 붉어지는 동안, 발가락 두 마디가 자갈길에 파묻히는 동안, 까마귀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이 붉은 길이 다 닳는 동안, 별 뜨는 서쪽으로 다가앉는 동안 풍화되고 뭉개진 마애불이 된 남자는 아직도 비우지 못한 한 단락 슬픈 기도를 제 몸 빈자리에 장엄하게 자문(刺文)하고 있는지.
4.
누가 누구를, 무엇이 무엇을 한 줄로 단정할 수 있겠는지.
계간 『문파문학』 2017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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