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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유진오 시인 / 한없는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3.

유진오 시인 / 한없는 노래

 

 

어매여

한없는 노래여

 

나는 시방

"자식은 애물"이라는

옛말을 생각하고 있다.

 

세치 앞이 안보이는 어매는

왜 그리 자꾸 속을 태우는가

그러다간 영 그 눈을

못쓰게 맹글지 않겠는가

 

골목 길을 골라서

행여 뒤따를 놈 있을가봐

뺑뺑 돌아서

 

아주 생판 딴 길을 갔다간

겨우 겨우 찾어서

남의 집 사랑방에 숨어 있는

"애물"을 찾어온 어매

 

"이자식아

네가 왜 그리 보구 싶으냐"

 

어매야

인젠 제발 나스지 마라

눈 어둡고 귀도 어두운 어매

돌아가는 길에

무엇에 칠가봐 정말 겁이 난다

 

요전에도

옷보퉁이를 들고

유치장(留置場) 문 밖에 와

쭈그리고 앉었더구나

 

취조(取調)를 나가는 길에

내가 부르지 않었더라면

"애물"을 알어 보지도 못할

어매야

다음부턴 아예

경찰서(警察署) 문(門) 앞에 얼씬도 마라

 

경찰서(警察署)로 감옥(監獄)으로

어매야 무던히도 다녔구나

백발(白髮)이 성성한 어매야

 

꿈자리가 사납더라고

걱정 끝에 점치러 가고

오오 어매야

그게 무슨 짓이냐

 

그렇지만

어매여

나의 자랑 나의 노래여

 

망보러 나갔을 때의

어매는 천리안(千里眼)이다

그리고

시골서 온 일가가

무어라고 무어라고

허튼 소리 지껄였을 때

어매는 훌륭히 해설(解說)을 했다

 

동네 여편네들이

주접을 떨 때

어매는 차근 차근

타일르구 가르쳐서

모오두 동무가 된 것을

어매야 아무리 숨겨도

나는 알았다

 

어매야

나는 어깨가 그만 으쓱해지더라

 

나는 어매가 바라보는

눈초리가 괴롭다

말없이 감박이며

어디까지나 따라오는

어매의 눈이 귀하기 때문에

몹시도 괴롭다

 

어매야

인젠 이 자식을 잊어버려라

 

그래도 어매는 못 잊을게다

아무리 나오지 말래도

무데기 옷 입고 비척 비척

"애물"을 찾아 나올게다

 

내가 안된다고 들어 가시라면

염려 말고 가라고 보내 놓고는

내 사라지는 뒷 모습을

넋없이 바라보다간

눈도 귀도 아조 영 못쓰게

상해버릴게다

 

그렇지만 어매야

나는 간다

그리기에 어매야

나는 잊고 쉬어다오

 

어매여

한없는 나의 노래여

 

창(窓), 정음사, 1948

 

 


 

 

유진오 시인 / 향수

 

 

   금시에 깨어질듯 창창한

   하늘과 별이 따로 도는 밤

 

   엄마여

   당신의 가슴 우에

   서리가 나립니다.

 

   세상메기 젖먹이

   말썽만 부리던 막내놈

   어리다면 차라리

   성가시나마 옆에 앉고 보련만

 

   아!

   밤이 부스러지고

   총소리 엔진소리 어지러우면

   파도처럼 철렁

   소금 먹은듯 저려오는 당신의 가슴

   이 녀석이

   어느 곳 서릿 길

   살어름짱에

   쓰러지느냐.

 

   엄마여

   무서리 하얗게

   풀잎처럼 가슴에 어리는

   나의 밤에

 

   당신의 옷고름 히살짓던

   나의 사랑이

   지열(地熱)과 함께

   으지직 또 하나의

   어둠을 바위처럼 무너뜨립니다.

 

   손톱 밑 갈갈이

   까실까실한 당신의 손

   창자 속에 지니고

 

   엄마여

   이 녀석은 훌훌 뛰면서

   이빨이 사뭇

   칼날보다 날카로워 갑니다.

 

 


 

유진오 시인 (兪鎭五.1922∼1949)

전라북도 완주 출생. 호 무헌(無軒). 1941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문화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45년 8ㆍ15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1946년 2월 25일 학병추모행사에 <눈 감으라 조용히>를 낭독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1946년 김광현, 이병철, 박산운 등과 전위시집(前衛詩集) (노동사)을 간행하였다. 1948년 10월 20일 발생한 여순반란사건 이후 반란군을 중심으로 ‘지리산유격대’가 형성되면서 1949년 초에 남로당 중앙지도부는 문화부장 김태준(金台俊ㆍ45), 시부(詩部) 유진오(兪鎭五ㆍ26), 음악부(音樂部) 유호진(劉浩鎭ㆍ21), 영화부(映畵部) 홍순학(洪淳鶴ㆍ29) 등을 파견해서 유격대의 문화 활동을 담

당하게 하는데, 이것이 당시 유명한‘지리산문화공작대사건’이다. 이들은 1949년 모두 체포되어 9월 27일부터 4일 동안 유진오, 김지회의 처 조경순 등과 함께 공개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감형되었으나, 그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이우태(李愚兌)의 빨치산 수기 남부군(南部軍) 에 의하면 유진오는 6ㆍ25 당시 노동당 전북도당 산하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중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1950년 3월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6.25 발발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