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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최남선 시인 / 가는 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2.

최남선 시인 / 가는 배

 

 

나는 간다 나 간다고 슬퍼 말아라

너 사랑는 나의 정(情)은 더욱 간절해

나는 용(龍)이 언제던지 지중물(池中物)이랴

자유대양(自由大洋) 훤칠한 데 나가 보겠다

 

돛 짜르고 사공(沙工) 적고 배도 좁으나

걱정마라 굳은 마음 순실(純實)하노라

예수 앞에 엎드리던 순한 물이니

우리 자신(自信) 제가 보면 어찌하리오

 

소년, 1908. 11

 

 


 

 

최남선 시인 / 가을 뜻

 

 

쇠(衰)한 버들 말은 풀 맑은 시내에

배가 부른 큰 돛 달아 가는 저 배야

세상시비(世上是非) 던져 두고 어느 곳으로

너 혼자만 무엇 싣고 도망하느냐

 

나의 배에 실은 것은 다른 것 없어

사면(四面)에서 얻어온 바 새 소식(消息)이니

두문동(杜門洞) 속 캄캄한 데 코를 부시는

산림학자(山林學者) 양반(兩班)들께 전(傳)하려 하오.

 

소년, 1908. 11

 

 


 

 

최남선 시인 / 구작(舊作) 삼편(三篇)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소

칼이나 육혈포나―

그러나 무서움 없네,

철장(鐵杖) 같은 형세(形勢)라도

우리는 어찌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짐을 지고

   큰 길을 걸어가는 자(者)임일세.

 

우리는 아무것도 지닌 것 없소,

비수나 화약이나―

그러나 두려움 없네,

면류관의 힘이라도

우리는 어찌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광이(廣耳)삼아

   큰 길을 다스리는 자(者)임일세.

 

우리는 아무 것도 든 물건 없소,

돌이나 몽둥이나―

그러나 겁 아니 나네

세사(細砂) 같은 재물로도

우리는 어찌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칼 해집고

   큰 길을 지켜보는 자(者)임일세.

 

나는 천품(天稟)이, 시인(詩人)이, 아니리라. 그러나, 시세(時勢)와 및, 나 자신(自身)의 경우(境遇)는, 연(連)해 연방(連方), 소원(素願)아닌, 시인(詩人)을 만들려 하니, 처음에는, 매우 완고(頑固)하게, 또, 강맹(强猛)하게, 저항(抵抗)도 하고, 거절(拒絶)도 하였으나, 필경(畢竟), 그에게 최절한 바 되어, 정미(丁未)의, 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되기 전(前) 삼삭(三朔)에, 붓을, 들어, 우연(偶然)히, 생각한 대로, 기록(記錄)한 것을 시초(始初)로 하야, 삼사삭(三四朔) 동안에, 십여편(十餘篇)을, 얻으니, 이, 곳, 내가 붓을, 시(詩)에, 쓰던 시초(始初)요, 아울러, 우리 국어(國語)로, 신시(新詩)의 형식(形式)을, 시험(試驗)하던, 시초(始初)라. 이에 게재(揭載)하는 바, 이것 삼편(三篇)도, 그 중(中)엣, 것을, 적록(摘錄)한 것이라. 이제, 우연(遇然)히. 구작(舊作)을, 보고, 그 시(時), 자기(自己)의 상화(想華)를, 추회(追懷)하니, 또한, 심대(深大)한, 감흥(感興)이, 없지 못하도다.

 

한 말 하는 일 조금 틀림없도록

몽매(夢寐)에라도 마음 두고 힘 쓰게

말이 좋으면 함박꽃과 같으나

일은 흉해도 흰 쌀알과 같더라

눈 비움도 좋으나

배부른 것 더 좋이

 

자유(自由)로 제 곳에서 날고 뜀은

옳은 이 옳은 일의 거룩한 힘

깊고 큰 저 연못에 거침없이

넓고 긴 저 공중(空中)에 마음대로

그와 같이 다니고

뛰노도록 합시다.

 

소년, 1909. 4

 

 


 

 

최남선 시인 / 국화(菊花) -1-

 

 

저 맵씨 저 향기로 봄빛 속에 섞인대도

모자랄 아무 것이 있을 리가 없건마는

겸손히 오늘에 와서 홀로 피어 있고녀

 

봄바람 여름 장마 차례차례 물리치고

가을의 이 영화(英華)가 그 그루에 맺혔거늘

지난 날 싸운 자취야 묻는 이가 있던가

 

일년의 모든 영화 아낌없이 남 맡기고

허술한 울타리 밑 귀통이땅 의탁하되

찬서리 집 없는 서슬 눈띄우지 않는가

 

한국일보, 1956. 11. 20

 

 


 

 

최남선 시인 / 국화(菊花) -2-

 

 

찬 선비 졸부(富)되는 추구월(秋九月)이 늦었어라

뜰앞의 타타황금(朶朶黃金) 엄청나지 아니하냐

이때야 밥 아니 먹다 배곯을 줄 있으리.

 

진황화(眞黃花) 위연명(僞淵明)*을 가릴 적도 옛날 일사

피거니 말거니를 묻는 이도 없을시고

동리(東籬)의 한참 총국(叢菊)도 너무 빛이 없도다.

 

천연코 순수하기 황국(黃菊)에서 더울뉘냐

취양비(醉楊妃) 오홍설백(烏紅雪白)* 가지가지 빛과 모양

시인(市人)의 호사(豪奢)장난야 무엇무엇 하리요.

 

* 이목은(李牧隱)의 중양시(重陽詩)에 `진황화 위연명(眞黃花 僞淵明)'이란 명구(名句)가 있다.

** 취양비(醉楊妃)와 오홍(烏紅)과 설백(雪白)은 재배국화(栽培菊花)의 명칭(名稱).

 

자유신문, 1954. 12. 13

 

 


 

 

최남선(崔南善)시인 / 1890~1957

국학자. 사학자. 호는 육당(六堂). 서울에서 출생. 1902년 경성 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우고,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3개월 만에 귀국, 1906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하였다. 1907년 <모의 국회 사건>으로 중퇴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 인쇄 시설을 갖춘 후 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우리 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909년부터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설립 위원이 되어 <청년 학우회가> 등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 섰다.

 1911년 <소년>이 폐간된 후 <아이들 보이> <샛별> <청춘> 등의 잡지를 계속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 보급과 민중 계몽에 공헌하였다. 3.1운동 때는 <독립 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 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듬해 가출옥하였다. 1922년에 동명사를 창설하여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고, 1924년에는 <시대 일보>를 창간, 사장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1927년에 논설 <불함 문화론>을 발표하였고, 1938년에 <만몽 일보>고문으로 있다가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 대학 교수가 되었다. 광복 후 반민족 행위자 처단법에 의해 복역했고, 6.25 남침 때 해군전사 편찬 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 편찬 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신문화 수입기에 있어서 언문 일치의 신문학 운동과 국학 관계의 개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요 저서에 시조집 <백팔 번뇌>와 역사서 <조선 역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