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 시인 / 가는 배
나는 간다 나 간다고 슬퍼 말아라 너 사랑는 나의 정(情)은 더욱 간절해 나는 용(龍)이 언제던지 지중물(池中物)이랴 자유대양(自由大洋) 훤칠한 데 나가 보겠다
돛 짜르고 사공(沙工) 적고 배도 좁으나 걱정마라 굳은 마음 순실(純實)하노라 예수 앞에 엎드리던 순한 물이니 우리 자신(自信) 제가 보면 어찌하리오
소년, 1908. 11
최남선 시인 / 가을 뜻
쇠(衰)한 버들 말은 풀 맑은 시내에 배가 부른 큰 돛 달아 가는 저 배야 세상시비(世上是非) 던져 두고 어느 곳으로 너 혼자만 무엇 싣고 도망하느냐
나의 배에 실은 것은 다른 것 없어 사면(四面)에서 얻어온 바 새 소식(消息)이니 두문동(杜門洞) 속 캄캄한 데 코를 부시는 산림학자(山林學者) 양반(兩班)들께 전(傳)하려 하오.
소년, 1908. 11
최남선 시인 / 구작(舊作) 삼편(三篇)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소 칼이나 육혈포나― 그러나 무서움 없네, 철장(鐵杖) 같은 형세(形勢)라도 우리는 어찌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짐을 지고 큰 길을 걸어가는 자(者)임일세.
우리는 아무것도 지닌 것 없소, 비수나 화약이나― 그러나 두려움 없네, 면류관의 힘이라도 우리는 어찌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광이(廣耳)삼아 큰 길을 다스리는 자(者)임일세.
우리는 아무 것도 든 물건 없소, 돌이나 몽둥이나― 그러나 겁 아니 나네 세사(細砂) 같은 재물로도 우리는 어찌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칼 해집고 큰 길을 지켜보는 자(者)임일세.
나는 천품(天稟)이, 시인(詩人)이, 아니리라. 그러나, 시세(時勢)와 및, 나 자신(自身)의 경우(境遇)는, 연(連)해 연방(連方), 소원(素願)아닌, 시인(詩人)을 만들려 하니, 처음에는, 매우 완고(頑固)하게, 또, 강맹(强猛)하게, 저항(抵抗)도 하고, 거절(拒絶)도 하였으나, 필경(畢竟), 그에게 최절한 바 되어, 정미(丁未)의, 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되기 전(前) 삼삭(三朔)에, 붓을, 들어, 우연(偶然)히, 생각한 대로, 기록(記錄)한 것을 시초(始初)로 하야, 삼사삭(三四朔) 동안에, 십여편(十餘篇)을, 얻으니, 이, 곳, 내가 붓을, 시(詩)에, 쓰던 시초(始初)요, 아울러, 우리 국어(國語)로, 신시(新詩)의 형식(形式)을, 시험(試驗)하던, 시초(始初)라. 이에 게재(揭載)하는 바, 이것 삼편(三篇)도, 그 중(中)엣, 것을, 적록(摘錄)한 것이라. 이제, 우연(遇然)히. 구작(舊作)을, 보고, 그 시(時), 자기(自己)의 상화(想華)를, 추회(追懷)하니, 또한, 심대(深大)한, 감흥(感興)이, 없지 못하도다.
한 말 하는 일 조금 틀림없도록 몽매(夢寐)에라도 마음 두고 힘 쓰게 말이 좋으면 함박꽃과 같으나 일은 흉해도 흰 쌀알과 같더라 눈 비움도 좋으나 배부른 것 더 좋이
자유(自由)로 제 곳에서 날고 뜀은 옳은 이 옳은 일의 거룩한 힘 깊고 큰 저 연못에 거침없이 넓고 긴 저 공중(空中)에 마음대로 그와 같이 다니고 뛰노도록 합시다.
소년, 1909. 4
최남선 시인 / 국화(菊花) -1-
저 맵씨 저 향기로 봄빛 속에 섞인대도 모자랄 아무 것이 있을 리가 없건마는 겸손히 오늘에 와서 홀로 피어 있고녀
봄바람 여름 장마 차례차례 물리치고 가을의 이 영화(英華)가 그 그루에 맺혔거늘 지난 날 싸운 자취야 묻는 이가 있던가
일년의 모든 영화 아낌없이 남 맡기고 허술한 울타리 밑 귀통이땅 의탁하되 찬서리 집 없는 서슬 눈띄우지 않는가
한국일보, 1956. 11. 20
최남선 시인 / 국화(菊花) -2-
찬 선비 졸부(富)되는 추구월(秋九月)이 늦었어라 뜰앞의 타타황금(朶朶黃金) 엄청나지 아니하냐 이때야 밥 아니 먹다 배곯을 줄 있으리.
진황화(眞黃花) 위연명(僞淵明)*을 가릴 적도 옛날 일사 피거니 말거니를 묻는 이도 없을시고 동리(東籬)의 한참 총국(叢菊)도 너무 빛이 없도다.
천연코 순수하기 황국(黃菊)에서 더울뉘냐 취양비(醉楊妃) 오홍설백(烏紅雪白)* 가지가지 빛과 모양 시인(市人)의 호사(豪奢)장난야 무엇무엇 하리요.
* 이목은(李牧隱)의 중양시(重陽詩)에 `진황화 위연명(眞黃花 僞淵明)'이란 명구(名句)가 있다. ** 취양비(醉楊妃)와 오홍(烏紅)과 설백(雪白)은 재배국화(栽培菊花)의 명칭(名稱).
자유신문, 1954.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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