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옥 시인 / 너무나 다중 적인 그를
내게 나였던 그를, 내가 앉던 자리에 그를 앉게 하였네 내게 서투르지만 그는 내 몸처럼 내 팔을 빌려쓰며 내 다리로 쉬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네 그런 길로 들어설 때마다 내 몸 속 쓰윽 관통하여 저기, 저기, 반대편까지 갔네 서둘러 간혹, 화사한 꽃들 사이, 함박눈으로도 나와 그를 불렀네 억센 바람이 나비들을 멀리까지 옮겨가던, 그런 것들이 문장의 쉼표라고 여기는 한, 그를 져버릴 수가 없었네 내게 나였던 그를 느낄 순 있어도 마음은 반대로, 짐짓 마음이 옆에 있어 내편인가 주위는 잃을 것 투성이, 큰걸 가져가면서도 얻어내는 것은 나비의 분가루쯤이었네 내게 나였던 그를, 걸어다닌 발자국만큼 따라다녔네 지금도 여기에서 저 끝까지를 길고 긴 강으로 여기지 않는 건 혼자라고 부른 적 없어, 불현듯 중얼중얼 혼잣말을, 드디어 그와도 말문을 텄네 길에서 혼잣말하는 이들과 비겼네 내게 따뜻한 덤불이 된 그를, 내 안의 무수한 다중인 그도 알게되었네 혼자 계단을 내려가고 혼자 점점 멀리까지 나갈 때도 아무렇지 않은 건 그가 있어서 였네 누군가가 숨겨 놓은 이가 누구냐고 물어오면 깜짝 놀랬네 내 안에는 그만 있었던 게 아닌, 몇 더 되는 다중이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 가끔 그가 내 몸에서 빠져나갈 때가 있긴 했었네 기다리는 게 지쳐 뜨거운 물을 왈칵, 틀어놓고 두 손을 오랫동안 담고 있었네 다중의 손은 유난히 뜨거워 그와 같은 온도로 올라갈 때까지 참았네 손을 떼었을 때는 두 손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네 발끝까지 온도가 내려가서야 비로소 한 사람이 된 것 같았네 여기까지 온 그를, 너무나 많은 나의 다중에 꽂혀있던 그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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