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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시인 / 손바닥 유전
어디쯤에서 발원 됐을까 난 혈구를 타고 당신 몸속으로 들어간다 유전 여행은 시작되고 화성평원, 두툼한 입구 주름진 둔덕 거슬러 오를 쯤, 평평한 대지였을 당신의 푸른 날들 펼쳐진다
월구 쪽으로 방향을 틀면 시간의 축척, 알마게스트와 난 동일성이다 수륙양용 M3벤의 궤도에 안착하는 푸르고 노란 이중성이 되기도 하는 난, 당신의 손금과 너무 멀다 당신은 저리도 먼 위성 이었나 목성구를 지나 검지로 오르면 회오리치는 지문. 토성구, 태양구, 수성구를 지날쯤 생명선과 지능선은 하나의 섬*을 만들고 그 둔덕 어디쯤 난 쉬어가기로 한다
한때 당신에게 쉼터였을 난 단일 유전자로 이 얼키고설킨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절단기에 손가락이 죄다 잘려버린 당신 대출을 받아 보금자리 주택을 마련할 때 희망 아파트 경비직을 구할 때 농성 주모자로 피의자 신분 확인을 받을 때조차 끊긴 지문을 내게 보이지 않으셨다 신작로 같은 내 손금을 만들기 위해 당신의 손바닥엔 저리도 많은 실금들이 생겨난 걸까 다행히 그곳엔 M*자형 쉼터가 있고 꽃피고 노래하던 당신이 깨어있고 반 마디, 그 반의 반 마디를 잇다보면 저 너머 내 손금이 보인다
'해고자 복직사수' 현수막 펄럭이는 송전탑 위에서 당신은 지금도 손금을 긋는 중이다 살그머니 손바닥을 포개자 실눈을 뜨며 웃으시는 당신 그렇게 당신은 잠자듯 깨어있고 깨어 있듯 잠을 잤다 그래 이쯤에서 손금이 내는 길은 유전이다 당신의 손금을 읽는 일은 내 손금을 보는 일, 당신의 손금이 내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와 길을 열어 준거다 '손금을 그어라 없던 길이 열린다' 갈라진 논바닥 같은 아버지의 손금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 손바닥엔 선명한 물길 흐른다
*섬-생명선과 지능선 운명선이 교차해서 생기는 삼각형의 손금 수상학에서 손바닥에 섬이 형성되면 잠재된 질병이나 우환을 예견할 수 있다고 한다
*M-수상학에서 생명선과 지능선 감정선이 교차해서 M자형 손금이 생기면 횡재운이 있음을 예견한다고 한다
이령 시인 / 칼이 사는 풍경
1.
자국은 찍히는 순간 음각이다 패여 본 후 돋을새김된다
둥글게 살기를 당부 받지만 삶은 대체로 세모다 높이를 벗어나기 위해 날개가 돋는 순간 내 방 작은 커튼은 어깨 죽지에서 달싹 거린다
파닥거리는 깃털을 말려줄 빛은 없는걸까
구로동 협성주택 사람들의 안부가 성가시고 질주하는 차들은 아득하고 화단구석 히야신스의 흰색이 '하자보수 궐기' 현수막에 가려 흔들리고 제 발자국에서 걸어 나와 날개를 펼치는 일이란 다비드의 손에 들린 돌멩이의 각오와 같아, 난 라임오렌지를 가슴에 새기며 '자기로 부터의 혁명'을 발 까락 마디마다 느낀다 난 꽃의 향기를 말했고 그들은 꽃의 부패를 노래했다
난 자주 납작하고 싶다
2.
날숨과 들숨의 비례가 각을 잃은 저녁, 난 아점을 먹는다 의도하지 않는 아침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흘러간 구름의 배꼽을 베는 일, 뭉텅한 머리로 저녁을 준비하는 여자의 뒷모습에 관해서도 할 말이 없다 쟈크의 콩나무처럼 자란 칼로 제 심장을 꺼내 샐러드를 버무리는 여자의 비장한 결의에 관해서도 할 말이 없다
된장이 끓어 넘쳐 붉새로 흐르는 저녁, 창 너머 '만도정밀 복직사수' 현수막이 쟈크 나이프의 각도로 걸려있고 삼교대의 아침과 저녁은 늘 메슥이고 뾰족하다는 건 누군가에겐 헛웃음이 되는 일인지라 저녁에 아침을 먹을 때처럼 아침에 지난 밤참을 먹을 때처럼 삶은 피쟁이 굿판같아 늘 실전적이다 명치에서 날이 선 호흡은 날카롭고
아침은 늘 반 이상 잘려 나간다
3.
바람을 집도(執刀)한 어둠, 공장의 창을 흔든다 베어링 기계음처럼 쫌쫌한, 가슴에서부터 부식된 별들이 사그락거리는 밤은 예리하다 어둠속으로 걸어간 별들이 건조한 각도로 사라지기도, 밤은 늘 금관악기처럼 섬세하고 파재래기처럼 적극적이기도,
새로운 별의 탄생을 예비 한다 나날이 자라는 별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빛이 궁금한 난 날카로운 빗살무늬 칼을 안고 산다 칼이 밤의 그림자를 도려내고 달빛을 드리워 아침의 내장을 가를 때, 난 싱싱하다 싱싱하게 산다는 건 머리에 별 하나쯤 새기는 일이라 나날이 벼르는 중, 굴뚝너머 달무리 쪽으로 새 한 마리
양각을 새긴다
이령 시인 / 직소퍼즐
굿모닝! 난 맨홀뚜껑이야 가로세로 높이보단 대각선이 좋아 하지만 사각은 사양할게 체할 수 있잖아 구름 지름이 내 입보다 큰 법은 없으니까 원형을 지향하지
굿앱터눈 난 엘리베이트야 사방이 내 눈이지 10층의 넌 1층 누르고 외출을 하고 돌아올땐 7층 누르고 4층은 걸어가지
넌 난장인가봐 키 작은 넌 비오는 날엔 우산으로 엘리베이트 버튼을 누르지 지하에서 옥상으로 다시 옥상에서 10층은 비켜가고 지금쯤 지상은 무사할까 비상벨이 필요하니?
여기서 하나 더 우린 누굴까, 맞춰볼래? 스핑크스 앞에서 죽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옆 보올엔 독약이 없지 스핑크스? 아니 그 앞에 죽은 안토니?
아니아니 독약을 든 클레오파트라? 왜 죽은걸까 그 여자? 고양이가 엎지른 어항에서 탈출 했지만 절로 호흡법 모르는 우린 죽은 금붕어 커플 이었거든 언제나 난 너의 사각판 너머 둥근 햇살이고 싶었건만
어디로 흘러 가야만 하니? 가끔 네 성기에서 누런 똥이 묻어나지만 난 애써 외면하지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넌 내 속에서 아프게 박힌다니까
그래 넌 온몸이 가시였구나 내게서 푸른잎이 되지못한 한 편의 비루(悲淚) 세면대 거울에서 걸어나오는 널 어떻게 정의할까 그것도 매일아침마다 말이야
어떤 에로티시즘으로 우리들의 아침을 열어줄래 부기로 자릴 옮긴 아침의 위력 사실 넌 사각의 틀에 갇힌 내 손톱이야 새살로 돋는 아침의 나신(裸身), 넌 아물지 않는 나의 상처
살면서 내려지는 이름들을 너에게 전하려다 점점 동글동글 모가 닳고 있나봐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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