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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사리 시인 / 헐거운 햇빛의 내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5.

김사리 시인 / 헐거운 햇빛의 내력

 

 

조여진 볼트와 너트처럼

이와 이가 맞물려 터질 것 같은 한때

불꽃 튀는 햇빛만이 모두였던 그때

내겐 구름이라곤 하나도 없었지

 

이젠 내 속이 비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 먹빛하늘도 들어와 앉네

닳아 없어진 것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야

흔적을 더듬어 가면

상처가 흘린 붉은 얼룩이 눈부셔

말 없는 돌의 이마위로 다시 반짝이네

 

더딘 걸음걸이와 늘어진 소매 사이

바람 수시로 드나들자

허공은 하늘의 틈새

손바닥은 지도의 틈새

네 맘속의 난 고독한 햇빛의 틈새가 되고 말지

틈새 속으로 따뜻한 바람 고이네

 

헐거워지는 것도 햇빛의 한 표지라고

물 한 모금 입 안에 머금고

오래오래 참으면 금 그은 햇빛의 경계에

키 높이만큼 자란 잡초가 보여

깎아지른 계단을 오를 때 문득 떠오르는

햇빛이란 두 글자로 된 묘비명

비바람과 눈보라를 뚫고나와

실눈 뜨고 보는 안개 낀 세상

가라앉는, 멀어진, 그러나

헐렁한 햇빛

낡은 깃발처럼 펄럭이네

 

 


 

 

김사리 시인 / 민달팽이

 

 

저것은 집이 없는 자의 슬픔, 또는 집을 버린 자의 자유

시각은 수시로 변한다

 

집이 짐이 되는 순간, 등은 무거워지고,

깃들 곳이 없는 순간, 등은 허무해진다

두 개의 선택에서

민달팽이는 자유를 택한 것

 

맨발의 사내, 여전히 몸을 부릴 곳은 저 바닥이다

그 많은 생각을 다 깔고 누운 동안

노숙의 냉기가 뼛속으로 달라붙는 동안,

 

하루가 빠르게 돌고

지구의 어깨가 기울어졌다

세상의 속도는 그를 비껴가고

여전히 느릿느릿, 그의 보폭은 바뀌지 않았다

 

먼 하늘로 달아난 한때의 별들

물컹, 그것을 밟았을 때 알아챘다

밟히는 순간 놀라 튀어나온 푸른 내장들

 

별들의 푸른 내장이 실핏줄처럼 비치는 것은

남은 목숨이 딸랑거리는 것처럼 쓸쓸한 일,

도시의 그늘이 깊어지는 밤

달팽이의 생각이 발등을 타고 오른다

 

신발을 잃어버린

오래전 기억이 달팽이의 몸속에서 출렁거린다

길고 긴 밤이 느릿느릿 끈적거린다

 

 


 

 

김사리 시인 / 어떤 마감

 

 

달이 어둠 쪽으로 턱을 괴고 있다

어둠은 불 켜진 건물, 달리는 차를 품고

불 꺼진 건물, 멈춘 차는 잠든 사람을 품는다

달이 어둠에게

어둠이 건물에게

건물이 사람에게 호렴*을 친다

오독오독 살아 좀처럼

숨죽지 않을 것만 같은 모난 것들

마침내 바닥에 귀를 대고 눕는다

길 위로 세상 모든 길들이 눕는다

달도 바닥에 눕는다

군고구마처럼 밤이 따끈따끈 데워질 때

두꺼운 프라이팬 위에서

달이 노랗게 익어간다

왕방울 눈을 뜨고 가로등도 잠이 든다

시간이 책갈피 한 장 가까스로 넘기고 있다

 

*알이 굵고 거친 천일염

 

 


 

 

김사리 시인 / 손가락

 

 

무언가를 적고 싶어

 

나뭇가지 끝의 이파리처럼

몸의 끝에 매달렸지만 세상과 가장 먼저 닿기도 하지

악기의 울대를 자극해

내 귀를 열게 한 적도 있어

 

이래서 되겠니, 그때 나는

낡은 피아노의 목소리를 믿지 않았어

목소리를 버린 피아노는 내 손가락을 거부했지

부지런한 천성이 결국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하고야만 현실,

흑백의 건반 사이로 믿었던 시간이 사라졌어

바락바락 악을 쓰고 거품을 물던 일상이

생손가락을 잘라먹고야 말았지

껍데기만 남아 껍데기로만 증명하는 삶이란

구멍 난 고무장갑과도 같은 것,

낡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순간

손가락이 말라버렸어

<이미>라는 순간은 지나가고 <아직은> 숨이 멎지 않은 인생

손가락 껍데기만 남아 생손가락이었던 젊은 시절을

간절히 불러들이고 있을 뿐

텅 빈 손가락이 바람을 불러 모으지만

피아노는 끝내 열 개의 손가락을 모두 삼켜버린 뒤였어

나는 기다렸지

이파리처럼 손가락이 돋아나기를,

가야할 곳을 가리키면서, 사라진 목소리를 그리워하며

 

 


 

 

김사리 시인 / 새벽공사

 

 

희뿌연 햇살 한 트럭 싣고

새벽이 공사현장으로 진입한다

저 많은 적재량은 늘 하루만에 소모된다

전망 좋은 숲 어귀

굴참나무는 제 그늘을 풀어

터 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역세권에서 든

졸참나무는 굴참나무인 척

그늘을 비벼 담장을 쌓는다

휘파람새는 청잣빛 목소리 돌돌 말아

초인종을 매단다

담쟁이넝쿨은 암벽을 기어오르며

그 많은 방을 하나하나 도배중이다

 

지붕을 이고 새가 방안으로 날아들자

새벽은 햇살을 찍어 담장을 칠한다

굴뚝이 몽글몽글 쏘아올린 연기로

울타리를 치고 있다

집 모퉁이 여기저기 둘러보며

막바지 공사 중인 굴뚝새 한 쌍

입주를 준비 하는 사이

내 둥지에도 어느새 동이 텄다

 

오늘을 완성하기 위해

어제는 미완성이었다

 

2014년 《시와 사상》 신인상 등단시

 

 


 

김사리 시인

밀양에서 출생. 2014년 《시와 사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