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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희 시인 / 십이월
산동네를 잘라 색종이를 만들었다 가장 화려한 십이월의 누더기가 천장에서 달이 되어 흔들렸다 세 개의 계절은 늘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겨울에서 오래도록 연체되었다
숫자의 악랄한 소진 법, 챙긴 것이 없다고 앙상한 숲의 간격들을 내보이지만 겨울은 챙기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
잡목숲은 오감을 잃은 나목들이 피부로만 숨을 쉬었다
십이월은 나무들만 추운 게 아니다 입김의 계절은 조금씩 무너지지만 영하의 빗방울이 헐벗은 고드름을 선물했다 그것은 투명하다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푹신한 눈이 겨울에는 맞다
숲이 버리고 간 목소리를 주워 밤이면 바람의 흉내를 냈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흐느꼈다 함께 흐느낀다는 것은 따뜻한 이불 같다
목도리가 알알이 빛나고 있다 일에서 십이까지 숫자들을 꽁꽁 묶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겨울까지 돈 벌러 온 계절 직종의 위장술 주머니는 다 어디 갔는지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 없는 계절이다
걷어내지 않아도 천장의 색은 바래고 공기는 수요와 공급처럼 약삭빠르게 자리를 바꾼다 최저임금 상승만큼 살짝 올라가는 1월의 기온을 기다린다
조미희 시인 / 지우개를 사용하세요
지우개 사용법을 터득한 날 아침
먹구름을 지우기로 했다
고시원 사각 벽면도 나도 지우개 같이 변하는 내일은 공갈빵이야 한껏 용기를 주잖아 몰려다니는 축제는 어디서 새고 있나 저기 풀죽은 사람 좀 봐 면접시간도 꽃피지 못한 이력서도 다 자유롭게 지워지길 바랄게
머뭇거림은 세 정거장의 길이와 버스 배차시간 사이의 혼란 모든 일은 견디지 못한 바로 몇 초 전 시차 속에서 탄생한다
닭 머리를 달고 살아보는 중이라고 조금 전 일조차 금방 잊어버린다는 대답
작년에 퇴짜맞은 이력서를 두 번 접어 회사대행업체에 들이밀며 그날과 똑같은 두근거림으로 면접을 보고 돌아서는 잘 접히지 않는 등은 데자뷰 법과 위법의 방정식은 손가락의 운동법 24시간 뜬눈의 사각 도시 몇 줄 이력서를 찢듯 단호한 대답은 펜을 쥐고 페이지를 넘긴 비만한 달의 실패담 즐비한 보름날의 예고편이지
가난한 날들은 빽빽한 검정 지워도 얼룩을 남기는 단어 얼룩도 꽃이 되기를
한 번도 맑은 구름을 밟아보지 않았거나 이제부터 먹구름만 밟아야 하는 당신을 위해 지우개 사용법을 권할게
조미희 시인 / 이상한 교실
우리는 당신들의 불편한 주간을 보호하기로 해 간혹 귀신도 안 물어가는 애물단지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주간이 되기도 하지 어쩌면 엇박자 걸음을 보호하는지도 모르지 우리는 원래 둥글지 않잖아 모서리가 많아 여기에 모였잖아 가지런한 이빨처럼 공기는 의연하고 질서 정연하지만, 당신들의 눈엣가시들은 뒤죽박죽 연주를 좋아해 봐, 나의 손뼉 나의 혓바닥과 자유로운 침의 착지 아무도 모를 걸 나의 행동은 매일 초침을 빠져나가려는 의식 같은 거라고 당신들의 뒤통수를 확실하게 내리친다는 걸 피아노의 높은 음자리 뛰어다니는 교실, 아니 아주 느리게 기어 다니는 주간들, 야간을 보호받지 못한 눈동자는 간혹 하품을 하기도 해 이 교실의 모양은 별 무늬 당신들은 자주 찔려 피나는 심장을 보호하려 어른 모양의 아이를 교실로 보내는 거야 천진난만한 괴성 우리는 지치지 않아 우리는 모르기로 약속된 거야 우리의 목록은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라고 당신들을 향해 실실 웃지
조미희 시인 / 조언들은 다 죽었다
왜 인간의 일을 인간에게 묻고 있나 명사 앞에 붙이는 이 부정사들 어리석고 무지하고 덜떨어진 내가 잘살고 있나 독백에게 묻는다
누군가 나에게 잘살고 있다고 믿는 믿음으로부터 허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말(言)의 빈곤자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쓰고 남은 말들이 많나
고양이의 수억만 개, 털 같은 눈발들이 날리고 너의 인내가 키우지 못한 식물들은 눈 위에 선명하게 발자국을 남기며 떠나지
집에 도착하니 집이 없다 지붕이 없고 방구들이 없고 가족이 없다 투명하다 길은 분해되고 쪼개져 점차 사라져 간다 누가 길을 지운 걸까
사는 것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 조언은 다 죽었다고 중심이 되지 않으려는 소리, 조언들은 기우뚱거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녁의 창문을 왜 한낮의 햇빛에게 묻나
조미희 시인 / 장롱
가령, 오늘 날씨는 장롱 속 같다고 느낄 때 안개가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 검은 악어는 눈알에 녹이 슨 채로 십 년 동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 버리기에 서운한 애착이 가득 찬 뱃속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습성이 생겼다 네 곳 모서리를 삼킨 뒤부터, 버티는 중력이 생겼다
별,
이사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네 개의 별을 폐허에 두고 간다고 폐허를 남긴 별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되뇌이지만 인부들이 번쩍 든 곳마다 먼지층이 가득한 별 악어의 눈물에선 쇠 맛이 난다 다시 커다란 문 두 짝이 달린 곳 좀 벌레들은 폐허의 중력 위험한 순간은 대부분 꼬리에 있고 꼬리를 자르는 저 별의 학명은 도마뱀 행성 빛과 그늘의 함축으로 유영하는 별들의 야반도주
별의 표면을 둘둘 말아서 버린다 탐사선이 보내는 자료에는 구덩이의 흔적이 많다 헐떡거리는 경사를 자르고 검은 웅덩이를 탈출하는 오늘은 별의 표면을 펼쳐놓고 폐허가 됐지만 한때는 어떤 힘이 있어 한 집안의 전부를 담았었다
모서리가 삭고 문짝이 떨어지는 힘으로 폐허는 사라진다 장롱은 목성으로 떠났다
2015년 《시인수첩》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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