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안나 시인 / 오늘의 사과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6.

서안나 시인 / 오늘의 사과

 

 

내 영혼에는 풀 한 포기 없으니

 

오늘의 사과는 흐리고 한때 비

 

나는 사과의 감정 속에 앉아있다

세상의 모든 셔츠와 모자를 쓰고

 

사과를 열면

계단이 없고 비상구가 없고 우산이 없다

집안싸움처럼 비가 내린다

사과는 바깥을 자주 감춘다

 

화요일에는 가족들과 시든 사과를 먹었다

사과를 먹으면 친절한 혈통이 된다

사과는 감정에 가까워 새벽에 잘 깨어난다

 

새벽에 어머니가

사과처럼 앉아있다

몰려나온 사과의 표정

손과 발이 없는 것들은 아름답구나

 

문장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붉어진다

 

고독을 지팡이로 때리면 사과 맛이 났다

 

나는 나를

겨우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오늘의 사과는 흐리고 한때 비

 

계간 『시산맥』 2019년 가을호 발표

 

 


 

서안나(徐安那)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겨울호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이 있음. 현재  <서쪽> 동인이며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