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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분 시인 / 젓가락에 대한 단상
1
삶은 고구마의 등에 꽂혀 있는 젓가락 빗나간 생의 또 다른 얼굴을 엿본다
2
어느날 식탁에서 무심코 떨어진 젓가락 한 짝이 발등에 상처를 내었다비명도 못 지르고 작살에 꽂혀 붉은 피를 흘리며 버둥거리는 고래 한 마리를 보았다 세상 속으로 떠밀려 와 두 눈을 그렁거리던
3
길이가 다른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올린다 기우뚱거리는 길을 걷는다
4
잘 맞는 젓가락 두 짝 두 짝일 때 비로소 모아진 힘 둘이서 하나되는
김혁분 시인 / 봄비 오는 날의 삽화
물러설 줄 모르는 거대한 황사의 군단, 자욱이 도시를 휘감고 있다 태양마저 지우며 허공을 휩쓸고 있다 꼭꼭 닫아버린 유리창의 경계를 늦추는 순간 집안까지 잠입하려는 놈의 집요한 몸짓, 가슴이 뻐근하다 갇혀버린 하얀 양옥집 베란다가 술렁거린다 화분 가득, 이제 막 웃음을 터뜨린 시클라멘이 마른 입술을 몰래 훔치고 있다 자꾸만 낮아지는 하늘, 침묵 속으로 모두 몸을 웅크렸다 누구도 서로에게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잠시 문밖으로 발을 내디디면 놈은 그 긴 손가락으로 민첩하게 목을 조여왔다 스물네시간, 25시간 시간은 더디 흐르고 있다 멈춰 서서 헐떡거린다 밤인 듯 낮이었던가 낮인 듯 밤이었던가 누런 장막을 허물며,
스적스적 봄비가 온다 점점이 읽어낼 수 없는 점자를 쓴다
낮게 귀 기울여야 보이는 꽃다지 노오란 향기 속으로 재깔재깔 파아란 봄비가 온다
누구에게 띄우는 메시지인가
김혁분 시인 / 황사
질끈 눈을 감고 숨을 쉬었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빨려들어 오는 황사, 희부연 옷자락을 끌며 죽은 언니가 소리 없이 걷고 있네 언니의 옷자락에서 먼지바람이 일고 있네 언니가 들려주고 싶어하던 이야기 그 속에 풀어져 있네 그 소리, 훅 풍기네 슬프도록 노릇한 울음의 냄새
울음도 삶의 한 방식인 걸 이제야 알았네
저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몰라 폐부 깊숙이까지 파고드는 오소소 돋는 이 떨림일까 제 홀로 꿈틀거리는 세상 위에 시뻘겋게 토해놓은 저 저 차디찬 울음의 포말 저 정도의 발악쯤이야 가벼운 듯 허공에 둥둥 떠서 흐르네
죽은 언니 다 썩은 속조차 차마 거두어 들이지 못했네
김혁분 시인 / 포도를 먹다
한 번의 입맞춤으론 미흡하지 쉽게 끝낼 수 없는 관계야
쪼옥 빨아 살짝 깨물어 봐! 입 안 가득 번지는 쉽게 벗어날 수 없어 가끔은 꿀꺽 삼키고 싶은 네 입술 네 혀 통째로 입안에 넣고 우물거릴 수 없는
네 아이를 갖고 싶어
손에 벌겋게 묻어나는 핏물 네 상처였어 내 허물이었어 함부로 뱉어낸 바닥에 흩어진 씨앗들
입술이 부르트도록 진한 연애를 할까 서툰 결혼을 할까
김혁분 시인 / 모래 인간
네이멍구 쿠부치 사막 달궈진 태양이 흘러내린다 신기루 따라 한 줌 모래로 허물어진 나는 사막 속에서 웃자란 사생아 내가 버린 계절 속으로 사막이 달려온다 우우 모래바람이 몰려온다 서걱서걱 쌓인 월요일 오전 11시, 나는 거기서 지워졌다 송두리째 사막의 기둥이 뽑힌다 모래로 교배되는 근친상간, 모래자궁이 어머니를 거두었다 낙타마저 발목 잡는 모래지옥 지평선만 맨몸뚱이로 남았다 가볍게 가라앉으며 입에서 항문까지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매장되자마자 뒤집힌 모래시계다 나는, 사라졌다
2007년《애지》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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