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겨울의 말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5.

최하림 시인 / 겨울의 말

 

 

1 눈의 그림자

 

조용히 맞아들여야지 숨소리 하나 없이 겨울이 가슴을 여미고 서울의 뒷산 도봉(道峯)에 내려 나에게 내 아내에게 물끄럼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겨울이 더러운 그리움을 쓸고 남루를 쓸고 검정 연탄과 구정물까지도 쓸고 살인과 방화까지도 모두 다 쓸어 버리고 속죄양인 양하고 있을 때

나는 맞아들여야지

문을 열고 마음으로 마음의 심연으로

달빛이 황홀한 바다를 건너서 그들이 오고가게 해야지

이삼 일 후면 헐리게 될 판자집 문을 지나

세상 모든 길을 떠나 세한을 걸어가게 해야지

 

2 첫눈 내리는 아침

 

춥고 추운 세상, 지리산이라든가 설악산 우리나라 서울

가로수 많은 거리에서는 바람이 신명을 다해 달리고

떡갈나무 빛 피를 흘리며 새들이 가고 있다

남으로 북으로 또 다른 곳으로

 

11월 아침, 마당에는 가득가득 눈이 내리고

골목길에도 눈이 덮였다.

어떤 부정의 발자국도 나지 않았다

 

병아리같이 보드란 아이를 안고 아내가

커튼을 걷고 유리창 너머로 눈을 보고 있다

추운 날이에요 옷을 튼튼히 입고 가셔야겠어요

라고 하면서 그의 세계를 쓸쓸한 눈으로 보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