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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겨울의 말
1 눈의 그림자
조용히 맞아들여야지 숨소리 하나 없이 겨울이 가슴을 여미고 서울의 뒷산 도봉(道峯)에 내려 나에게 내 아내에게 물끄럼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겨울이 더러운 그리움을 쓸고 남루를 쓸고 검정 연탄과 구정물까지도 쓸고 살인과 방화까지도 모두 다 쓸어 버리고 속죄양인 양하고 있을 때 나는 맞아들여야지 문을 열고 마음으로 마음의 심연으로 달빛이 황홀한 바다를 건너서 그들이 오고가게 해야지 이삼 일 후면 헐리게 될 판자집 문을 지나 세상 모든 길을 떠나 세한을 걸어가게 해야지
2 첫눈 내리는 아침
춥고 추운 세상, 지리산이라든가 설악산 우리나라 서울 가로수 많은 거리에서는 바람이 신명을 다해 달리고 떡갈나무 빛 피를 흘리며 새들이 가고 있다 남으로 북으로 또 다른 곳으로
11월 아침, 마당에는 가득가득 눈이 내리고 골목길에도 눈이 덮였다. 어떤 부정의 발자국도 나지 않았다
병아리같이 보드란 아이를 안고 아내가 커튼을 걷고 유리창 너머로 눈을 보고 있다 추운 날이에요 옷을 튼튼히 입고 가셔야겠어요 라고 하면서 그의 세계를 쓸쓸한 눈으로 보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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