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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고향(故鄕)에 와서
아내는 눈 속에 잠이 들고 밤새워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전등을 켜고 머리맡의 묵은 잡지를 뒤적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미닫이에 달빛이 와 어른거리면 이발소집 시계가 두 번을 쳤다
아내가 묻힌 무덤 위에 달이 밝고 멀리서 짐승이 울었다 나는 다시 전등을 끄고 홍은동 그 가파른 골목길을 생각했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고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옛 친구와 벌이는 술판이 늘 즐겁지만은 않다 좋은 세월 다 보내고 놓치고 늘그막에 면사무소 앞에 다방을 차리고 들어앉아 젊은 애들 잡고 우스개나 던지는 친구야 활갯짓으로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와 산허리에서 닭을 치는 것으로 바람을 잡은 친구야 너희 작은 행복 자잘한 꿈을 알 리 없는 내 얘기야 끝없이 겉돌기만 하겠지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너희 땀과 눈물이 섞인 강물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사람살이란 모이며 흩어지며 흘러가는 것이라고 부질없는 혼잣말은 해서 무엇하랴 강물에 비친 내 얼굴만 달보다 더 섧구나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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