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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고향(故鄕)에 와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6.

신경림 시인 / 고향(故鄕)에 와서

 

 

아내는 눈 속에 잠이 들고

밤새워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전등을 켜고

머리맡의 묵은 잡지를 뒤적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미닫이에 달빛이 와 어른거리면

이발소집 시계가 두 번을 쳤다

 

아내가 묻힌 무덤 위에 달이 밝고

멀리서 짐승이 울었다

나는 다시 전등을 끄고

홍은동 그 가파른 골목길을 생각했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고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옛 친구와 벌이는 술판이 늘 즐겁지만은 않다

좋은 세월 다 보내고 놓치고 늘그막에

면사무소 앞에 다방을 차리고 들어앉아

젊은 애들 잡고 우스개나 던지는 친구야

활갯짓으로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와 산허리에서

닭을 치는 것으로 바람을 잡은 친구야

너희 작은 행복 자잘한 꿈을 알 리 없는

내 얘기야 끝없이 겉돌기만 하겠지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너희 땀과 눈물이 섞인 강물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사람살이란 모이며 흩어지며 흘러가는 것이라고

부질없는 혼잣말은 해서 무엇하랴

강물에 비친 내 얼굴만 달보다 더 섧구나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