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3.

강은교 시인 / 섬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에 흐르는가

지었네,

바다는 왜 사이에 넘치는가

우리는 왜,

이를 수 없는가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 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灰].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소리  1

 

 

어서 가요, 어머니

이 햇빛 따라가요, 어머니

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는데.

바라보면 동으로 동으로

힘주어 흔들리는데.

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

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 흥건히 남아 우리 얼굴 비추는

이 햇빛 따라가요.

 

갈 곳 몰라

헤매는 저 구름덩이들과

살 틈마다 웅크려 누운 고름들

울창한 어둠일랑

쓱쓱 베어내고

잡초 베어내듯

쓱쓱 베어내고.

 

바람도 우리 등 밀어 주네요

마른번개도 데려와

와르릉 쾅

앞산의 그림자들

죄 걷어 가네요.

 

이 골 저 골 부르튼

발들이여 모여라

없는 길 만들어

씽씽 달리게

이제야 이제야

불함산(不咸山)*으로 달리게.

 

    위의 복은 등에 지고

    아래 복은 머리에 여

    앞의 복은 안아들여

    옆구리 복은 껴들여

 

아, 이제 보이네요.

벌판 따라 일어서는 길 저 끝으로

춤추며 반가운 아리라*

핏멍 맺힌 뼈

마디 마디마다

첨 보는 꽃들 웃으며 오고

한숨 수북 쌓여 있는 가슴께에선

신천지라 신천지라

잔물결 이는 소리.

 

하늘님이여

복 주신 우리네 하늘님이여

아리라 찬물에

지난 길 모두 씻어

흰 돌 맑은 신단(神壇) 세우리니

부디 거두어 주사이다

님의 큰 옷섶에

거두어 주사이다.

 

* 불함산(不咸山): 백두산(白頭山)의 고명(高名)

** 아리라: 송화강(松花江)의 고명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소리  4

 

 

님이여, 아 멀리 계시는 님이여

허구헌 날 불어 대는 저 바람소리처럼

형체도 없으신 님이여

지금쯤 어느 진흙구렁을 지나시기에

어느 산 깊은 그림자에

젖은 옷깃 담그고 계시길래

지새는 밤이면 밤마다

손 닿지 않는 별빛만 보내오시고

동구 밖 시든 풀 줄거리엔

무서리 가득가득 던져 놓으시는지

아무도 뵈지 않아라.

훤히 뜬 내 두 눈엔

넘쳐나는 눈물 기어코

눈발 되어 쏟아져라.

그날 님과 잘라 가진 반쪽 거울엔

비추이느니 피울음 황혼, 황혼뿐

지는 달도 반만 번뜩이는데

어찌하리, 여기엔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 너무 많으니

그 이름들 밤이면 무서리로 내려 내려

온 땅 하얗게 우는 걸 어찌하리.

님이여, 아 행방불명하신 님이여

허지만 어딘가에서 자꾸 오고 계실 님이여

내일이면 불현듯 눈처럼 달려오셔서

이내 몸 환히 알아보시라.

밤 끝에 해는 더 높이 일어서고 있으니

튼튼한 솔잎 너머 까치 울음소리

오늘 따라 가까이 내려오고 있으니

가실(嘉實)님, 나의 님이여.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소리  7

 

 

그 때 노인은 바람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풍선 서넛 목매단 차양 아래

햇살은 진창길 할퀴며 달려나오고

우리는 잠시 등 뒤를 손가락으로 털었다.

목마는 얼씬대는 구름 그림자 하나 없이

쇠기둥에 매달려 안간힘 안간힘인데

개펄 노인의 뺨에선 땀방울이 헐레벌떡 모래 누운 길을 가리켰다.

 

    저길 좀 봐요, 길 한복판

    버얼건 입김 허공에 펄럭대며

    구겨져 누운 저 남자

    가슴에서 다리에서 허리에서

    너울져 내리는 피의 폭포

    휩뜬 눈 서리서리

    감기는 해덩이

 

저길 좀 봐요, 바람 굽이굽이

시퍼런 시퍼런 하늘 건너

눈물들 한바탕 우짖는 길 건너

한 입 피 베어문 달 어느새

산그림자 위에 앉았네요

날개 펴고 활활

나네요.

 

저길 좀 봐요,

몰매 맞은 나무와 풀들

퍼덕퍼덕 온 들판에 까무라쳐

허공 향해 뿔뿔이 드러눕는 것을.

사색이 된 강물

한 큰 바위 아래 가까스로 멈추며

휘날리는 꽃잎 꽃잎 가슴결 틈틈이 동여매는 것을.

 

    그날 우리는 보았지.

    살빛도 못 가리는 우리네 옷섶마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빗방울이며

    그리 사랑하던 이

    황산벌 풍경마다 볼 비비며

    볼 비비며 끌려가던 것을.

 

어디로 가시나이까, 왕(王)이시여

 

    바라보면 얼기설기 구름뿐

    헌데투성이 백강(白江)의 하늘

    젖은 모래밭엔 매달리느니 길길이 뛰는 어둠인데

 

    바위여, 천공에 늘어선 꿈이여

    물결에 얹혀 우리 영영 출렁이게 하라.

    목메이게 세상 가득

    꽃내 흐드러지게 하라.

 

그 때 노인은 우뢰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골목 밖마다 튀어나올 별빛 아이들 목늘여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목마를, 간밤 꿈자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온 산마루 훨훨 타오르는 꿈, 우리는 마른 번개에 이마 흠씬 베고 바람벽에 뒤뚱거렸다.

넘치는 백강(白江)의 우뢰는 끝없어

흐려지는 눈시울 우리는 캄캄한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닦았다, 노인의 어깨 너머 넘실대는 거품이며

얼떨결에 개켜 놓은 살점들이며

아직 흐르지 않은 한숨들, 이슥토록 눈물들……

별빛 아이들은 끝내 오지 않아

거품 곤두박질치던 길 어언 간 곳도 없어.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