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시인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나는 병신입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이 슬픈 몸을 움직여 이 절뚝거리고 비비적대는 우스운 몸뚱아리를 움직여 한판 춤을 추다가 서리맞은 이 목숨이 허, 허, 웃을 진한 춤을 추다가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놀아야 어디까지 놀아야 우리는 가는 것인가
춤이란 뭐냐 하면 곱게 가다듬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장육부가 움직여 줘야 징그럽게 이뻐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건드리는 대로 춤을 추시오, 팔자병신은 팔자병신대로 문둥병신은 문둥병신대로 육갑이 풀리는 대로 춤을 추시오, 뒤엉키는 살아 있음의 신명나는 곡선대로 ―
생즉원(生卽願)이요 생즉원(生卽怨)이니, 여기는 아쟁과 장고가 부르는 미친 살풀이판이요 히, 히 ―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김승희 시인 / 달걀 속의 생(生) 1
우리는 꿈꾸지, 삶을 위하여 좀더 강해졌으면 하고, 보다 견고한 집을 짓고 싶고 더욱 안전한 껍질을 원하네, 마치 몰락이 없이 차갑게 버티고 있는 벽처럼 진짜로 강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철교처럼 결코 폭파될 수 없는 어떤 희망을 구하지, 전혀 희망이 없이
그리고 또한 우린 알고 있어, 우주에 내버려진 하나의 달걀 과도 같이 그대와 나는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버림받은 허술한 알[卵]이라는 것을, 수문이 열리면 제목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저녁물결 속에 고요히 으깨지는 조그만 수포 그리도 꿈 같은 고통
하얀 달걀이 하나 뜨거운 물 속에서 펄펄 끓고 있네, 찐 달걀 속에선 어떤 부화의 깃도 돋아나질 않아,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들의 비명, (달걀 꾸러미 속에 얌전히 누워 있는 하얀 찐 계란들의 꽉 찬 평화) 무섭게 달궈진 프라이 팬 위에서 성녀처럼 와들와들 해체되는 스크럼블드 에그, 어떤 꿈도 그 고통을 구할 순 없지
우주에 둥둥 떠돌고 있는 독방 처럼 헐벗고, 외로운, 달걀 속에서 우린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꾸리고 있네, 뿌리가 없어 무엇보다도 뿌리가 없어 슬프지만 이름 없는 운동 뒤에 하얀 결말,
모든 달걀은 와삭와삭 깨어져 무참히 와해되고 말지만 그 안에 방이 있어 방이 하나 있어 내 얼굴을 닮은 조그만 양초 하나가 고요히 빛을 뿌리며 타오르고 있지, 눈물과 함께 입술연지로 환한 미소를 은은히 뿌리면서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김승희 시인 / 달걀 속의 생(生) 3
달걀 석 줄 삼십 개를 엊그제 사 와서 한 개만 남기고 다 먹어 치웠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랑은 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유리창 하나 없는 이 봉사사랑. 가나다라 말문 하나 못 여는 이 벙어리 사랑 속에서 넌 또 마지막 하나 남은 달걀 껍질 속에 웅크려 앉아 무슨 난생설화를 꿈꾼다는 것이냐. 아니 무슨 난생신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냐.
난, 그렇게, 12월의 흐린 지평선 아래 웅크리고 앉아 병아리들 종종거리는 어느 봄날의 파란 미나리밭을, 꼬꼬댁 꼬꼬 ― 금빛 닭들이 홰를 치는 어느 태초의 푸른 새벽을 마치 금시조를 기다리듯 꿈꾸고 있거늘
그대, 푸른 접시 위에, 내일 아침 금빛 계란 후라이 하나가 담겼는가. 지붕 위로 푸득거리며 날아가는 황금빛 금시조 한 마리를 보았는가. 그러면 그대, 그때 꼭 한번 더, 나의 안부를 다시 물어주게.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김승희 시인 / 달걀 속의 생(生) 5
달걀을 보면 알 수 있지. 아, 저렇게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나.
조그맣게 차갑게 두 눈을 감고 아, 어찌해, 저리도 못다한 벙어리 사랑을.
외치고 싶고 깨지고 싶어도 시간의 실금이 온몸에 강물처럼 퍼지기를 기다려. 배꼽 같은 씨눈이 노른자위를 먹어 치워 흰자위를 먹어 치워 아, 그 안에서 원무처럼 일어서는 열애 같은 혁명을 기다려.
달걀을 보면 눈물이 어리지. 아, 저렇게 미해방의 절벽 위에서 꿈꾸는 사람!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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