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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새로운 소리를 찾아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마종기 시인 / 새로운 소리를 찾아서

 

 

1. 소리의 발단(發端)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소리는

작고 큰 공기의 흔들림이

세 개의 흰 뼈의 다리를 지나

드디어 맑은 물에 닿을 때

피어나는 것.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리는

당신 가슴의 수많은 떨림이

길고 은근한 여행에서 돌아와

드디어 벗은 몸의 밝은 눈을 뜰 때.

 

2. 새 소리

 

마지막 남은 몇 잎의 낙엽이 총 맞은 작은 새가 되어 핏빛으로 비틀거리며 하강(下降)하는 소리 들으면서, 나는 손잡아 세워 줄 사람도 없는 공동(空洞)의 어두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도 여전히 눈 위에서 어는 어려운 울음 소리를 듣겠군.

 

3. 물 소리

 

소년은 종일 자갈돌을 시냇가에 던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천천히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긴 나무 그림자가 시내의 한 끝을 어루만지며 덮는 소리 들릴 때까지, 그래서 이제는 소리가 하늘보다 오히려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까지 유심히 보고 있었다.

 

4. 소리의 생태(生態)

 

손바닥에 장못을 박던 소리

발등을 겹쳐 못 박던 소리

높고 메마른 입술에서 현기증 일으키며

피 흘리던 사람의 소리 이후

 

소리를 죽이는 소리,

작은 소리를 치는 큰 소리

큰 소리를 물어 뜯는

여러 개의 작은 소리,

쓰러지는 소리,

소리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

빨리 일어나는 소리.

 

피 흘리던 사람의 소리 이후

고통을 받는 자는 느낄 뿐

고통의 소리는 나지 않는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성년(成年)의 비밀

 

 

최후(最後)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不貞)한 나목(裸木)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 날아도 끝없는

성년(成年)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스페인의 비

 

 

낡은 베레모를 쓰고

오징어 튀김에 싼 술을 마신다.

부두가에는 가는 비 저녁에 내리고

개 한 마리 저쪽에, 개 한 마리 이쪽에

귀에 익은 유행가처럼 흔들거린다.

어두워서 더 어지럽다.

술 취한 빈 골목마다 나이 먹은 성당(聖堂),

옛날의 비가 되어 어깨를 두드린다.

한평생 쌓인 죄가 모두 씻어질 때까지

성당에 기대어 긴 잠이나 잘거나,

나이들면 술취한 어부가 될거나,

잠 속에서 보이는 그 슬픔이나 될거나.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시인(詩人)의 용도(用途) 2

 

 

하느님,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 못 하게 하세요.

어두운 골방에 앉아 하루 종일 봉투 만들고

라면으로 끼니를 잇는 노파를 아신다면,

하느님, 내가 외롭단 말 못 하게 하세요.

쉽게는 서울 남쪽 변두리를 걸어서

신흥 1동, 2동 언덕배기 하꼬방을 보세요.

골목길 돌아서며 피 토하는 소년을 아신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영양실조도 있었어요.

 

하느님, 내가 사랑이란 말 못 하게 하세요.

당신의 아들이 아직 인자(人子)로 살아 있을 적에도

먼지 쓴 신자(信者)의 회초리가 드세기도 하더니

세계의 곳곳에는 그 사랑의 신자들 가득하고

신자에게 맞아 죽은 신자들의 시신(屍身),

내 나라를 사랑해서 딴 나라를 찍고

하느님 영광을 찬송하는 소리 들어 보세요.

고통도, 사랑도, 말 못 하는

섭섭한 이 시대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쓸쓸한 물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