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시인 / 새로운 소리를 찾아서
1. 소리의 발단(發端)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소리는 작고 큰 공기의 흔들림이 세 개의 흰 뼈의 다리를 지나 드디어 맑은 물에 닿을 때 피어나는 것.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리는 당신 가슴의 수많은 떨림이 길고 은근한 여행에서 돌아와 드디어 벗은 몸의 밝은 눈을 뜰 때.
2. 새 소리
마지막 남은 몇 잎의 낙엽이 총 맞은 작은 새가 되어 핏빛으로 비틀거리며 하강(下降)하는 소리 들으면서, 나는 손잡아 세워 줄 사람도 없는 공동(空洞)의 어두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도 여전히 눈 위에서 어는 어려운 울음 소리를 듣겠군.
3. 물 소리
소년은 종일 자갈돌을 시냇가에 던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천천히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긴 나무 그림자가 시내의 한 끝을 어루만지며 덮는 소리 들릴 때까지, 그래서 이제는 소리가 하늘보다 오히려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까지 유심히 보고 있었다.
4. 소리의 생태(生態)
손바닥에 장못을 박던 소리 발등을 겹쳐 못 박던 소리 높고 메마른 입술에서 현기증 일으키며 피 흘리던 사람의 소리 이후
소리를 죽이는 소리, 작은 소리를 치는 큰 소리 큰 소리를 물어 뜯는 여러 개의 작은 소리, 쓰러지는 소리, 소리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 빨리 일어나는 소리.
피 흘리던 사람의 소리 이후 고통을 받는 자는 느낄 뿐 고통의 소리는 나지 않는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성년(成年)의 비밀
최후(最後)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不貞)한 나목(裸木)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 날아도 끝없는 성년(成年)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스페인의 비
낡은 베레모를 쓰고 오징어 튀김에 싼 술을 마신다. 부두가에는 가는 비 저녁에 내리고 개 한 마리 저쪽에, 개 한 마리 이쪽에 귀에 익은 유행가처럼 흔들거린다. 어두워서 더 어지럽다. 술 취한 빈 골목마다 나이 먹은 성당(聖堂), 옛날의 비가 되어 어깨를 두드린다. 한평생 쌓인 죄가 모두 씻어질 때까지 성당에 기대어 긴 잠이나 잘거나, 나이들면 술취한 어부가 될거나, 잠 속에서 보이는 그 슬픔이나 될거나.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시인(詩人)의 용도(用途) 2
하느님,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 못 하게 하세요. 어두운 골방에 앉아 하루 종일 봉투 만들고 라면으로 끼니를 잇는 노파를 아신다면, 하느님, 내가 외롭단 말 못 하게 하세요. 쉽게는 서울 남쪽 변두리를 걸어서 신흥 1동, 2동 언덕배기 하꼬방을 보세요. 골목길 돌아서며 피 토하는 소년을 아신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영양실조도 있었어요.
하느님, 내가 사랑이란 말 못 하게 하세요. 당신의 아들이 아직 인자(人子)로 살아 있을 적에도 먼지 쓴 신자(信者)의 회초리가 드세기도 하더니 세계의 곳곳에는 그 사랑의 신자들 가득하고 신자에게 맞아 죽은 신자들의 시신(屍身), 내 나라를 사랑해서 딴 나라를 찍고 하느님 영광을 찬송하는 소리 들어 보세요. 고통도, 사랑도, 말 못 하는 섭섭한 이 시대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쓸쓸한 물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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