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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1-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1-

 

 

오는가, 누구

저 닳은 들 밖에서

울리지 않는 종

소리 울리며

바삐바삐 다가오는 이.

 

뼈의 그늘을 핥고

핥아 속속들이 어둠 빛으로

타오르면서

무한궁륭(無限穹隆) 넘고 넘어

결코 멸하지 않으면서.

 

추어라

불의 춤을 추어라

오는 강 오는 바람

끝없이 뒤척이는

 

떨어진다, 여자들은

구렁으로

소리친다, 산[生] 것 모두

함께 부둥켜 안아.

 

오라 친구

달콤한 잠

와서 가만가만 여기

살[肉]내 나는 재[灰]를 묻어라.

 

이슬의 대지에

다만 녹으라 녹으라

명령하며.

다음 일어서라 일어서라

구원하며.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2-

 

 

죽어도 죽지 않는

피[血]의 소요를.

살아도 살지 않는

살[肉]의 평온을.

언제나 있는 슬픔의

언제나 없는 슬픔을.

 

보고 있었어, 난

결코 잊을 수 없었어, 한 탄생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탄생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물의 죽음 뒤에

불의 태아(胎芽).

 

눈뜨고 이렇게

쓰러져 누운 벌레들 짐승들

은빛 비늘 반짝이는 물고기들

입술 부비며 침 흐르며

저녁 연기 사방에

쏘다니는 것들.

눈뜨고 이렇게.

 

흐르는 자는 복되도다.

한 번 흐르고

다시 흐르는 자는

은총받도다.

핥아라, 네 어둠이

구름을 벗기고

구름 밖 기다리는

그 사람

 

무릎에 재[灰]로

잠들 때까지.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3-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어둠이 저를 이끌고

빛이 저를 묻으니

사자(死者)는 복되라

사자(死者)여 그리워라.

 

나 오래 여기 있었네.

먼지 길 바쁜 내 가슴

파도 늘 울리는 발의

바다, 아침에

나 벌써 저녁을 기다렸네.

저녁에 다음 아침

탐내 꿈꾸듯

 

눈물이던 한때 내 얼굴

게거품이던 한때 내 입술도

한밤중 없는 이마 헤매어 맞추던

내 잠도

여기 입다문 나팔꽃 실뿌리 되어

앉아 있네 튼튼히 살아 있네.

 

오라 즐거이 썩으라

엉켜 잊지 못하는 자들

이 나팔꽃 꿈속

어둠아비보다 더 넉넉히

꽃피우라 노래하라.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4-

 

 

수레야 달려라, 연기가 간다

이끼 짙은 지붕마다 눈부비고 일어나

허허벌판 돌아보며 돌아보며

그리워 아주 눈감고 간다.

 

수레야 달려라, 구름이 간다

버릴 수 없는 사랑 빗물로

잠깐 잠깐 쏟으며

동그란 눈물산 여기저기

이루며 간다.

 

수레야, 아무도 뵈지 않아

수레야, 아무도 멈추지 않아

캄캄한 길을 누웠다 일어나는

누웠다 일어나는 해 얼굴 뿐.

 

수레야 달려라. 풀이 간다

일어서 바람에 꺾이며

엎드려 바람 피하며

괴로워 다시 제 씨앗 뿌리며

간다.

 

간다, 바다가 간다

물새들 날개, 새우들, 게들 비린내

심장기슭에 묻혀

굽이굽이 몸부림

사라지고자.

 

달려라, 황금수레야

데려가라, 이 수만 발자국

그대의 광야, 결코 돌아옴 없는

포근한

소멸의 방(房)으로.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