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1-
오는가, 누구 저 닳은 들 밖에서 울리지 않는 종 소리 울리며 바삐바삐 다가오는 이.
뼈의 그늘을 핥고 핥아 속속들이 어둠 빛으로 타오르면서 무한궁륭(無限穹隆) 넘고 넘어 결코 멸하지 않으면서.
추어라 불의 춤을 추어라 오는 강 오는 바람 끝없이 뒤척이는 밤
떨어진다, 여자들은 구렁으로 소리친다, 산[生] 것 모두 함께 부둥켜 안아.
오라 친구 달콤한 잠 와서 가만가만 여기 살[肉]내 나는 재[灰]를 묻어라.
이슬의 대지에 다만 녹으라 녹으라 명령하며. 다음 일어서라 일어서라 구원하며.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2-
죽어도 죽지 않는 피[血]의 소요를. 살아도 살지 않는 살[肉]의 평온을. 언제나 있는 슬픔의 언제나 없는 슬픔을.
보고 있었어, 난 결코 잊을 수 없었어, 한 탄생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탄생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물의 죽음 뒤에 불의 태아(胎芽).
눈뜨고 이렇게 쓰러져 누운 벌레들 짐승들 은빛 비늘 반짝이는 물고기들 입술 부비며 침 흐르며 저녁 연기 사방에 쏘다니는 것들. 눈뜨고 이렇게.
흐르는 자는 복되도다. 한 번 흐르고 다시 흐르는 자는 은총받도다. 핥아라, 네 어둠이 구름을 벗기고 구름 밖 기다리는 그 사람
무릎에 재[灰]로 잠들 때까지.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3-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어둠이 저를 이끌고 빛이 저를 묻으니 오 사자(死者)는 복되라 사자(死者)여 그리워라.
나 오래 여기 있었네. 먼지 길 바쁜 내 가슴 파도 늘 울리는 발의 바다, 아침에 나 벌써 저녁을 기다렸네. 저녁에 다음 아침 탐내 꿈꾸듯
눈물이던 한때 내 얼굴 게거품이던 한때 내 입술도 한밤중 없는 이마 헤매어 맞추던 내 잠도 여기 입다문 나팔꽃 실뿌리 되어 앉아 있네 튼튼히 살아 있네.
오라 즐거이 썩으라 엉켜 잊지 못하는 자들 이 나팔꽃 꿈속 어둠아비보다 더 넉넉히 꽃피우라 노래하라.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생자매장(生者埋葬) -4-
수레야 달려라, 연기가 간다 이끼 짙은 지붕마다 눈부비고 일어나 허허벌판 돌아보며 돌아보며 그리워 아주 눈감고 간다.
수레야 달려라, 구름이 간다 버릴 수 없는 사랑 빗물로 잠깐 잠깐 쏟으며 동그란 눈물산 여기저기 이루며 간다.
수레야, 아무도 뵈지 않아 수레야, 아무도 멈추지 않아 캄캄한 길을 누웠다 일어나는 누웠다 일어나는 해 얼굴 뿐.
수레야 달려라. 풀이 간다 일어서 바람에 꺾이며 엎드려 바람 피하며 괴로워 다시 제 씨앗 뿌리며 간다.
간다, 바다가 간다 물새들 날개, 새우들, 게들 비린내 심장기슭에 묻혀 굽이굽이 몸부림 사라지고자.
달려라, 황금수레야 데려가라, 이 수만 발자국 그대의 광야, 결코 돌아옴 없는 포근한 소멸의 방(房)으로.
빈자일기, 민음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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