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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집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노향림 시인 / 집

 

 

전세집들이

불티나게 나왔다.

 

호박넝쿨이 목을 아래로 내린

베란다 있는

집도

나왔다.

 

갠 하늘이

물먹은 종이처럼

간간이 펄럭이고

 

집을 얻으러 떠도는

사람들이

 

철로꽃같이

지워진 가슴에

없는 영혼으로

목을 뺀 채

기웃거리는

개천 가

 

들여다보면

물 속에

흐트러진 하늘 끝이

모두 집이었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해녀

 

 

맑은 날이면 압해도는 안 보이네.

 

둔덕 너머 사는 여자들이

 

허리춤에 제각기

 

갈쿠리와 그물을 차고 나갔다가

 

살이 까지거나 허벅지가 긁힌 채

 

모두 빈손으로

 

돌아오네.

 

한밤중이면 그물에 걸린

 

겁 먹은 바다가

 

으르렁으르렁 털 투성이 짐승이 되어

 

울고 있네.

 

어디서 출렁이며 떠돌고 있을까

 

살아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섬.

 

실눈을 뜨고 그 섬을

 

몰래 본 사람들은

 

인기척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문학사상사, 1992

 

 


 

 

노향림 시인 / 황혼(黃昏)

 

 

구화학교(口話學校) 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그 뒤에 하늘이

정신 잃고 눈 몇점으로

남아서 떠 있다.

 

한동안 생각하고 나더니

노선버스 한대가 들어가고

나온다.

 

깊섶에 내다 넌 이불들

털어들일 때다.

 

언덕받이 뒤로

느릅나무 몇몇이 헐벗은 몸을

간간히 떨고 섰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노향림 시인 / K 읍기행(邑紀行)

 

 

오랜만에 만나는 분위기.

 

하나의 선(線)이 되어 평야(平野)가 드러눕는다.

 

일대(一帶)는 무우밭이 되어

회색 집들을 드문 드문

햇볕 속에 묻어 놓고

 

몇 트럭씩

논밭으로 실려 나가는

묶인 고뇌(苦惱)와

고장난 시간(時間)들.

 

지나다 보면

낯이 선 사투리들이

발길에 툭 툭 채였다.

 

길가 사람들 속에서

구부정한 말채나무가

혼자 목을 쳐들고.

할 일 없이 혼자 쳐들고 있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