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향림 시인 / 집
전세집들이 불티나게 나왔다.
호박넝쿨이 목을 아래로 내린 베란다 있는 집도 나왔다.
갠 하늘이 물먹은 종이처럼 간간이 펄럭이고
집을 얻으러 떠도는 사람들이
철로꽃같이 지워진 가슴에 없는 영혼으로 목을 뺀 채 기웃거리는 개천 가
들여다보면 물 속에 흐트러진 하늘 끝이 모두 집이었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문학사상사, 1987
노향림 시인 / 해녀
맑은 날이면 압해도는 안 보이네.
둔덕 너머 사는 여자들이
허리춤에 제각기
갈쿠리와 그물을 차고 나갔다가
살이 까지거나 허벅지가 긁힌 채
모두 빈손으로
돌아오네.
한밤중이면 그물에 걸린
겁 먹은 바다가
으르렁으르렁 털 투성이 짐승이 되어
울고 있네.
어디서 출렁이며 떠돌고 있을까
살아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섬.
실눈을 뜨고 그 섬을
몰래 본 사람들은
인기척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문학사상사, 1992
노향림 시인 / 황혼(黃昏)
구화학교(口話學校) 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그 뒤에 하늘이 정신 잃고 눈 몇점으로 남아서 떠 있다.
한동안 생각하고 나더니 노선버스 한대가 들어가고 나온다.
깊섶에 내다 넌 이불들 털어들일 때다.
언덕받이 뒤로 느릅나무 몇몇이 헐벗은 몸을 간간히 떨고 섰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노향림 시인 / K 읍기행(邑紀行)
오랜만에 만나는 분위기.
하나의 선(線)이 되어 평야(平野)가 드러눕는다.
일대(一帶)는 무우밭이 되어 회색 집들을 드문 드문 햇볕 속에 묻어 놓고
몇 트럭씩 논밭으로 실려 나가는 묶인 고뇌(苦惱)와 고장난 시간(時間)들.
지나다 보면 낯이 선 사투리들이 발길에 툭 툭 채였다.
길가 사람들 속에서 구부정한 말채나무가 혼자 목을 쳐들고. 할 일 없이 혼자 쳐들고 있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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