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시인 / 기차에 대하여
철길 옆의 가건물 사이로 둥근 지붕만 스쳐보이는 저기 기차는 제철의 무거운 몸을 사슬처럼 끌고 불꽃을 튀기기도 하며 요란스럽게 새벽의 차가움을 두드리고 지나가지만 밀고 가는 낯선 미지도 어느새 허전한 레일이 되어 여기서 보면 질주는 적막한 흔적인 셈인가
하지만 풍경 또한 순간의 정지(停止)를 넘어서서 저렇게 빠른 점멸로 물들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숙직시키지 못한다, 다만 스쳐지나게 할 뿐 그대가 끌고 온 세월, 그대의 것이 아니듯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으면서 기차는 기적을 울리면서
왜 바퀴를 굴려 스스로의 길 숙명처럼 이으면서 기차는 가야 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 오는 벌판 저쪽에 마침내의 휴식이 있는지 덜컹거림은 낮게 낮게 사라지고 한동안의 바람 소리 이내 잔잔해질 테지만
여명의 선로 저쪽엔 더 많은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 정적을 휘저어 놓은 저 불켜진 창 하나하나가 어둠에 스미는 분별의 눈일지라도 기차는 제 몸에 부딪히는 풍경만 일별할 뿐 순식간에 저렇게 힘차게 지우며 지나간다
푸른 강아지와 놀다, 문학과지성사, 1994. 11
김명인 시인 /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나를 쫓아온 눈발 어느 새 여기서 그쳐 어둠 덮인 이쪽 능선들과 헤어지면 바다 끝까지 길게 걸쳐진 검은 구름 떼 헛디뎌 내 아득히 헤맨 날들 끝없이 퍼덕이던 바람은 다시 옷자락에 와 붙고 스치는 소매 끝마다 툭툭 수평선 끊어져 사라진다
사라진다 일념도 세상 흐린 웃음 소리에 감추며 여기까지 끌고 왔던 사랑 헤진 발바닥의 무슨 감발에 번진 피얼룩도 저렇게 저문 바다의 파도로서 풀어지느냐 폐선된 목선 하나 덩그렇게 뜬 모랫벌에는 무엇인가 줍고 있는 남루한 아이들 몇 명
굽은 갑(岬)에 부딪혀 꺾어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둡고 외진 길목에 자식 두엇 던져 놓고도 평생의 마음 안팎으로 띄워 올린 별빛으로 환해지던 어느 밤도 있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는 수없이 물살 흩어지면서 흩어 놓은 인광만큼이나 그리움 끝없고
마주서면 아직도 등불을 켜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돛배 한 척이 보인다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김명인 시인 /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 Ⅱ
내 마침내 남도 끝에 서다 수평 위엔 철없이 곤두박질치는 까치노을 부서지며 파도 섬찌ㅅ하게 물보라 뿌려 굽은 갑(岬) 너머 흰 구름 몇 송이 흩어지누나
벗어나랴, 차라리 변방 구석진 곳에 엎드려 몇 만리 끌고 온 그리움 흉금에 새겨 슬픔이나 근근히 가꾸랴 목측(目測) 너머 아득하게 시선 꺾어지고 돌아서면 끝 모를 목숨의 낭떠러지 무슨 인연의 진달래만 저렇게 지천으로 선홍빛 욕망의 소지(燒紙) 사뤄 날리는지
한 점 붓 끝에도 눈시울 젖어, 바다여 바라보면 배 한 척 흐르고 있다
머나먼 곳 스와니, 문학과지성사, 1988
김명인 시인 / 눈 속의 빈집
흐르는 이 길을 나도 거쳐왔던가 수면에 닿을 듯 억새들이 바람에 산란하는 것을 바라보면 견마(犬馬)여, 시리게 헤쳐온 저 노역의 하늘이 이제 막 일을 마친 눈꽃을 펼쳐 한 시절을 설경한다 눈은, 풍경을 만나자 풍경을 지운다 물을 만나선 흔적 없이 다리 아래로 빠져 나가는 물살들의 중얼거림 그리고 땅거미 풀려 나와 한떼의 시간들을 잔광의 거미줄로 빠르게 얽어매는 동안 희미하게 솟은 난간의 쇠기둥에도 걸리며 빈집을 끄는 쇠기러기떼 저 아뜩한 이사 (그러나 철새들만 힘겹게 제 집을 떠메고 가는 것은 아니리) 눈은, 풀뿌리에 기댄 발칫잠, 전생은 죄 잊어버리고 한갓진 불빛에도 넝마처럼 더풀거리는 가등(街燈) 사이 저 작은 빈터가 저의 집인 듯 식솔들을 끌고 분주하게, 분주하게 내린다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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