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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희 시인 / 나의 마차(馬車)엔 고갱의 푸른 말[馬]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김승희 시인 / 나의 마차(馬車)엔 고갱의 푸른 말[馬]을

 

 

아이들, 맨발의 아이들이 튼튼한 팔뚝으로

흰 도화지 가득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저 나이의 아이들은 무엇을 그리나

보고 싶어

분홍빛 모래 들판을 파란 풀을 밟으며

다가가 보았다.

 

아이들은 태양을 그리고 있었다.

황금빛 태양을 화판 가득히 넘쳐나게 하고

그리고 파란 크레용으로 그린

저 푸른 들의 들판.

그곳에 말[馬]들은 뛰놀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푸르고 생생(生生)한 말들을 많이 그렸다.

크레용이 타오르는 야생의 금빛 말.

흰색 말. 검은 말.

 

나는 이 분홍 말[馬]을 가질래.

금빛 이마를 한 사내아이가 크레용을

좀더 칠하면서 말했다.

그럼 나는 이 흰색 말.

 

가래머리를 땋은 계집아이가

꼭 꽃처럼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무슨 말을 가질래요?

여기 우리의 말 나라에서?

 

정말 나는 무슨 말을 가지면 좋을까.

일상의 칸막이를 뛰어넘기 위하여

부서진 마차(馬車)를 날개 달기 위하여

내 생의 비본질을 살해하기 위하여

정말

나는 무슨 말을 가지면 좋을까.

아저씨는 여기에서 무슨 말을 가질래요.

 

도시에서 거리에서

찻집에서 책방에서

나는 때때로 그 아이의 태양이 넘치는 음성과

부딪친다.

 

내가 죽어 있을 때

내가 가장 죽어 있을 때

가령 나는 아이들의 말 나라로 가고 싶어서

해안을 걷는다.

 

해안 속에서 아이들은 죽고

도화지 속에서 태양만 빛나는 우리들의 일상.

나는 장갑을 벗고 모자를 벗고

그리고 나의 스틱을 버렸다.

타오르는 크레용을 들어

나는 나의 마차(馬車)를 그리고

포장이 없는 마차 뒤엔 무질서의 열병을

가득 그렸다.

나는 울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때 탄색 모래 저편에서

머리칼을 날리며

한 사람의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푸른 크레용을 들어

거칠게 한 마리의 말을 나의 마차에 매었다.

푸르고 푸른 말.

나의 마차(馬車)는 강(江)과 강(江), 들과 들을 건너

하늘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모래가 빛나기 시작했다.

해안이 춤추었다.

 

아이들, 맨발의 아이들이 튼튼한 웃음으로

페이브먼트 가득히 말[馬]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파란 크레용으로 그린

저 푸른 들의 들판

그곳에 말들은 뛰놀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며 있었다.

 

태양미사, 고려원, 1979

 

 


 

 

김승희 시인 / 낙화암 벼랑 위의 태양의 바라의 춤

 

 

울고 있구나, 불아, 너는 왜 항상 벼랑 위에 서 있니? 말해봐, 촛불아, 바람은 부는데……

 

가장 푸른 자오선을 목에 걸고 여자들이 벼랑 위에 서 있다, 말해봐, 불아, 누가 나를 벼랑으로 부르는지…… 어둠이 가득 찬 내 척추의 흰 뼈에 누가 자꾸만 한 덩어리 촛불을 당기는지……

 

오늘, 여기에선, 가장 숨죽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상여소리 바라소리 피리소리 요령소리……오늘, 여기에서, 벼랑은 태양의 갈기를 달고…… 해는 하늘에도 있고 강물에도 있어서……천지의 맞닿음이여, 바라의 부딪침이여…… 햇덩어리 물덩어리 마음덩어리들이 부딪쳐…… 피톨 속에 피어나는 일만 덩이의 바라의 태양꽃들을 너는 보았느냐……목숨이여……핏속으로 부풀면서 터지는 희디흰 두견의 피여……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늘 언제나 벼랑이 있지, 눈먼 사랑, 치렁치렁 흘러가는 유황의 죽음의 물…… 말해 봐, 촛불아, 누가 저 태양의 바라를 흔드는지,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왜 늘 벼랑이 있고, 벼랑에서 추는 춤만이 왜 홀로 아름다움의 갈기를 가졌는가를……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김승희 시인 / 난폭

 

 

운신할 기운조차 없다

꿈처럼 방이 무너져 내리고

선반 위의 살림살이들이 쓰러져

내 몸을 붙들고

아프게 때린다

 

죽을 힘을 다해

나는 돌아눕는다

허공에서 거울이 깨어지며

나의 모가지를 병마개처럼 따고

한 송이 조화(弔花)를 꽂고 있다.

 

순간 피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한다

나의 골에서 찬란한 단두대의

밧줄이 뻗어나와

나의 모가지를 향해 달려나간다

 

온몸이 찢기며

나는 웃는다

찬란한 미소가 뜨거운 찻물처럼

끼얹히는 것을 느끼며

나의 심장은, 그러나,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열파가 나의 두 눈을 감긴다

용암불에 성냥이 닿은 것처럼

나의 뼈 퉁소와 같은

나의 긴 뼈엔 향기로운 신이 가득하여

누에고치의 얇은 막처럼

가벼이 나의 피부가 터지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렇게 죽어라

아니, 아니, 그렇게 삶을

맛보거라

삶이여―너― 아름다운 흉성이여

기꺼운 치욕이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김승희 시인 / 넝마의 운율

 

 

벽을 보아도 이젠 목을 매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전엔 벽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어디에 못을 박고 목을 매달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런 류의 길을 가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에겐 시간이 무척 따스하고 행복했을 것 같다. 어느 시간을 열어야 못자욱 없는 벽을 만날 수 있을까?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엉겅퀴꽃 뒤에서

날아 간다

이 세상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소식이다

가슴에 눈물을 많이 모은

알들만이

그런 엄청난 시위를 할 수 있다

헌 신문지 같은

지상의 누더기들을 슬고

저렇게 눈부신 인육(人肉)의 퇴원을 해보았으면!

 

세탁기 속에서

탈수된 빨래들을 정리하다가

양말과 손수건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보면 죽고 싶다고 넌 나에게 말했지.

넌 그러니? 아, 어쩌면, 넌, 정말……

 

난, 글쎄, 난, 말이야,

그런 것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것을 믿게 되고,

쓰레기가 쓰레기에게 친절하게 굴듯이

삶에게 마구 달려 들어

삐약삐약거리고 싶구나, 글쎄……

 

벽 위에 남은 희미한 못자욱들. 지워지지 않는다. 별똥무늬 달려와 박힌 누전의 뜸처럼. 그렇게 별들과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도 있구나. 못을 박으며 못을 박으며 그리움의 벼락에 구멍 숭숭 뚫린 넝마 한 장의 모습으로 별들의 수로를 이곳에 내려던 사람아. 그러니까 넌 지금껏 벽에 의해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넌 지금껏 별에 의해 살아온 것이다. 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0

 

 


 

김승희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이상 시 연구로 국문과 박사학위 받음.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에도 당선.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33세의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과 소설로는『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등이 있음.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