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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희 시인 / 정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2.

문정희 시인 / 정구

 

 

정구를 친다.

 

천사같이 하얀 그대의 날개에서

포롱거리며

내게로 오는 한 알의 우주.

 

야채처럼 싱싱한 햇살이 내리는

녹음 한낮에

그대가 내게 주는 한 알의 우주.

 

나는 다시 그대에게

나를 보낸다.

 

사랑이란 서로를 주는 것이듯

우리들은 우리들의 우주 속에 빠져서

힘껏 서로를 주고 있었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 참회 시(詩) 1

 

 

말로써 우리가 감동되던 시대는 갔다.

우리들은 모두 어두움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이 되어

몸으로 올라

몸으로 올라

온몸으로 통곡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감동이다.

 

봄이 오면

내 기다림과 부끄러움을 말하리라.

새벽이 오면

나는 꿇어앉아 기도하리라.

손풍금 소리 같은 나이 어린 자유(自由).

눈 멀고 힘 잃은,

결코 순백해야만 하는 우리 어머니 앞에

바람 따라 쏠려다니던

죽은 말들의 서러움을.

말이 다시 노래가 되고,

노래는 흐르고 흘러서

아, 감동의 푸른 나무로 부활되기를.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 촌장(村長)

 

 

촌장님 용서하셔요.

쑥처럼 뻣세져서

산불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봐도

무심한 이 눈을

눈을 빼서 꽃씨처럼 종이에 싸서

한 십년 후에 오는 봄에

뿌리려 함을 용서하셔요.

 

어둠이 쌓이고 쌓여서

새벽을 만든다지요.

`불을 끄라! 불을 끄라!

눈에 켠 불을 끄라!

적이 온다. 중요한 시기다.

이때 빠꼼대는 게 그 누구얏!'

 

촌장님

이때 속노래 함을 용서하셔요.

`절망을 부끄러워 말라.

수많은 잎처럼

쌓이고 쌓여서

썩어 문드러져

호수 속의 노래되어

졸 졸 흐를지니'

 

아, 울다가 잡혀간 친구를

기다리는 이 겨울.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 받음. 1969년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아우내의 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등과 시극 『구운몽』, 『도미』 및 수필집  『당당한 여자』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