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시인 / 석가(釋迦)
한껏 `말'밖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느냐 내 차라리 한낱 벙어리였으면 좋을 것을. 인생(人生) 팔십(八十)은 너무도 짧아, 내 이제 허무(虛無)히 죽어가나니 뉘 있어 나를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리? 수만(數萬)마디 설법(說法)들이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미처 `중생(衆生)'을 죽이지 못하였다. `말'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선(善)도 악(惡)도 미(美)도 추(醜)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늙고 지쳐 병(病)들은 이 몸, 껍질만 남은 더러운 몸뚱아리를 미처 죽이지 못하였다. 아아, 도(道)를 죽이지 못하였다.
그대들은 먼저 나를 죽여라, 시퍼런 비수로 내 가슴을 찌르라. 희망(希望)을 죽여라 해탈(解脫)을 죽여라 우리들은 새로운 자유(自由)를 만들어낼 순 없다. 다만 자유(自由)가 아닌 것들을 죽여야 할 뿐 보이는 대로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애야 할 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羅漢)을 죽이라 보살(菩薩)을 만나면 보살(菩薩)를 죽이라 네 부모(父母)를 죽이라. 친척과 권속을 죽이라, 그리고
사랑을 죽이라, 너를 죽이라!
차라리 벙어리라면 얼마나 좋으랴 차라리 백치(白痴)라면 얼마나 좋으랴 날카로운 식칼 아래, 싱싱한 펄떡임으로 핏방울 흩뿌려, 힘있게 죽어가는 생선(生鮮) 토막이라면, ―내 얼마나 좋으랴.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에서/광마집, 심상사, 1980
마광수 시인 / 석조전(石造殿)
임금님이 사시던 덕수궁엘 감히 들어와 때 묻은 은전(銀錢) 몇 푼 내고 무엄하게 들어와 석조전 앞에 서면 나는 내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다.
우선 저 동양과 서양의 을씨년스런 배합도 그렇지만 특히나 석조전은 서양의 고대풍(古代風)을 닮은 순 돌집인 까닭에 아무래도 고대 로마의 노예제(奴隸制) 생각이 울컥 나서 주제넘게도 노동자들이 불쌍해진다.
아름다움이 꼭 진리일까, 노동자들은 석조전의 아름다움을 음미(吟味)해가며 그 돌집을 지었을까. 제법 민주적 지성인인체 하는 나는 이 야릇한 흥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석조전의 흰 돌들을 보면 또 이런 생각도 든다. 가령 흰 갈매기나 백조가 순백(純白)의 피부를 자랑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선 작은 물고기들을 수없이 잡아먹어야 한다. (가끔 고기의 핏방울들이 그 고상한 흰 털 위에 묻을지도 몰라)
하긴 나도 훌륭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선 계속 식물이건 동물이건 잡아먹어야 하지 때론 사람까지도 자유까지도
역사와 역사(役事)의 관계도 그렇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역사(役事)가 중국의 역사와 위신(威信)을 한껏 높여주었다 그렇지만 그걸 짓느라고 참 많이들 죽었다. 역사(歷史)가 위냐 역사(役事)가 위냐
그러나 역시 나는 석조전 앞뜰이 내 집 정원 쯤 이라면 참 좋겠다. 내가 그 안에 사는 왕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렇다면 석조전을 보며 느끼는 이 민주주의식(式) 울분은 뭐냐. 질투(嫉妬)냐 동정(同情)이냐 양심(良心)이냐
나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1976,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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