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시인 / 집어등(集魚燈)*
꽃밭 속일까 바다 속이 정녕 꽃밭 속일까 대관령 위 너훌너훌 흘러가는 흰 구름 속 그 구름 뭉게구름 꽃밭 속일까
아니라네 아니라네 뱃사내들 혼령 삼킨 시퍼런 바닷물 속 열 번도 고개 저어 꽃밭 속 아니라네
해마다 여름 되면 이까*철이 돌아오고 이까철 돌아오면 오징어배 타던 사내 이른 새벽 단칸방에 처자식 남겨두고
나누는 몫 3․7제 고용살이 밤샘 어로 파도에 목숨 거는 생때 같은 사내들아
피 토하는 통곡소리 부둣가에 들리는데 끝 모를 그 밑바닥 어질머리 바닷물 속
오징어잡이 불꽃이 너무 밝아서 밤새워 허기져 물레 돌릴 때 그대 눈에 헛보이던 시퍼런 바닷물 속 그 바다 천 길 파도 꽃밭 속 아니라네
그대 혼령 삼켜버린 시퍼런 바닷물 속 그 바다 너훌너훌 흰 구름도 아니라네
* 오징어잡이를 할 때 켜는 등불. 2,500촉짜리 전구를 한 배에 100여 개 이상 단다고 한다. 어부들은 그 뜨거운 불빛 아래 밤새워 어로작업을 하다 보면 바다가 마치 꽃밭 속인 것처럼,흰 구름 속인 것처럼 착란을 일으켜 바다에 실족해 빠져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속초 부두의 한 선술집에서 들었다.
** `오징어'의 일본식 발음, 즉 いか. 속초 지방에서는 흔히 이렇게들 부른다.
피뢰침과 심장, 창작사, 1986
김명수 시인 / 찔레 열매
12월달 어느 날 싸락눈이 내린 오후 어린 아들 함께 산에 오르다가 얼음 덮인 골짜기에 빨간 열매를 보았네
황량한 골짜기에 풀잎들은 서걱이고 마른 나뭇가지들도 정적에 싸였는데 긴 겨울 잎 떨어진 찔레덩쿨 위에 서리에도 안 떨어진 그 열매가 눈부셨네
이제 겨울 깊어 흰눈 쌓이면 모이 없는 멧새들이 와서 따 먹으리
인적 없는 골짜기 빨간 그 열매 모이 없는 꿩들에게 모이가 되리
때로는 눈물짓던 내 영혼아 네 바램 어디에 두고 있느냐
어느 날 내가 죽어 깊은 겨울 오면 인적 없는 골짜기 모이라도 되랴
긴긴 겨울 잎 떨어진 찔레덩쿨 위에 서리에도 안 떨어진 그 열매가 눈부셨네
피뢰침과 심장, 창작사, 1986
김명수 시인 / 피뢰침
아득히 솟아 있는 높은 굴뚝 위에 날카로운 은빛 피뢰침 하나
캄캄한 구름 하늘 덮을 때 비로소 반짝이는 피뢰침 하나
천 번도 만 번도 어두운 밤중에 너는 왜 슬프게도 불타지 않는가
온 누리에 번개도 휘몰아 올 때 너는 왜 슬프게도 쓰러지지 않는가
피뢰침과 심장, 창작사, 1986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정란 시인 / 파롤, 가난한 말 외 1편 (0) | 2020.03.08 |
|---|---|
| 김남조 시인 / 아침 은총 외 4편 (0) | 2020.03.08 |
| 김남주 시인 / 조선의 딸 외 2편 (0) | 2020.03.08 |
| 황금찬 시인 / 백운대를 보며 외 3편 (0) | 2020.03.07 |
| 김박은경 시인 / 황홀은 그 다음 (0) | 2020.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