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조 시인 / 아침 은총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생금(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동행, 서문당, 1976
김남조 시인 / 애가(哀歌)
사뭇 나는 앓고 있다 내 육체와 정신의 어느 틈서리에 병은 숨겨 온 꽃씨 모양 싹이 텄는가
꼭 죄를 닮은 병이 죄의 가책과 질고와 비밀한 감미마저를 닮고 있는 병이
나를 가두어 열린 유리창 창머리에서 오늘은 전혀 말을 잃게 한다
진종일 실바람만이 넘나드느니 생애의 빈객(賓客)은 어느새 모두 다녀들 갔다는겐가 마음의 공동(空洞)엔 이제 와 누구의 영혼을 담아 향기롭게 할 것이며 그 고귀한 여광(餘光)으로 등불을 삼으랴
스스로운 성지(聖地)에서 바라옴 없는 바라옴이 순한 과목(果木)인양 커 가는…… 그런 환한 풍경이나 강림해 주었으면 싶다
내 육체와 정신의 어느 틈서리에 펄럭이며 피어나는 이 불씨는 무엇인가
실바람 함께 머언 꽃내음이 넘나드는데 열린 창머리에선 꼭 죄를 닮은 병이 나의 손목을 잡고 있다
정념의 기, 정양사, 1960
김남조 시인 / 어머님의 성서(聖書)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의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음악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동행, 서문당, 1976
김남조 시인 / 오월(五月)에
그늘도 밝은 오월이어
당신을 피해 당신 없는 따끝까지 갔으나 어디서고 만나는, 먼저 와 계시는 당신
진실은 마침내 시간이 알게 하느니 못 잊을진대 이 불망(不忘)을 섬기리 어여쁘디 어여쁜 숙명(宿命)이어
다시는 미혹(迷惑) 없으리니
막을 길 없이 열리는 두 영혼의 한낱 통로(通路)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 1983
김남조 시인 / 요람소곡(小曲)
엄마에게 남은 시간에서 얼마만큼 네 곁에 있어 주랴 엄마에게 남은 눈물에서 널 위해 얼마나 울어 주랴
숨긴 상처 달빛에 풀어 보듯 고루 퍼지는 볕살
내 아기야
고단한 천사(天使)를 맞아 공손히 잠재우듯 너를 안고 엄마는 먼 곳의 바람을 근심한다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 1983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진경 시인 / 아무래도 나는 외 1편 (0) | 2020.03.08 |
|---|---|
| 김정란 시인 / 파롤, 가난한 말 외 1편 (0) | 2020.03.08 |
| 김명수 시인 / 집어등(集魚燈)* 외 2편 (0) | 2020.03.08 |
| 김남주 시인 / 조선의 딸 외 2편 (0) | 2020.03.08 |
| 황금찬 시인 / 백운대를 보며 외 3편 (0) | 2020.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