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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란 시인 / 파롤, 가난한 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8.

김정란 시인 / 파롤, 가난한 말

부제: "언어의 본질은 `결핍'이다"라는 명제를 기쁨의 이름으로 뒤집기

 

 

아이들의 팔랑이는 옷

나는 옷의 확실한 물질성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애들의 드러나지 않은 순결한 밀빛 살 위에

아, 저렇게 어두운 빛의 옷이, 어째서?

아줌마, 아이들이 다가와 말했다

봄, 아줌마, 그래요, 우리는 봄이에요

 

우리의 봄의 몸에 입혀진 가을의 옷

그게 딱해서 그래요?

하지만 어때요, 결핍으로 인해

우리의 봄의 존재 이유는 한결 돋보이는걸

 

어떤 이가 말했다, 아주 딱딱한 자로

우리의 몸을 탁탁 두들겨서

일렬로 서게 만든 뒤에,

"애구 딱해라 간난한 족속들"

 

우리는 결핍의 옷을 마구 흔들어댔다

모르시는 말씀 우리는 뒤서거니 앞서거니

마구잡이로 대열을 흩뜨렸다

우리가 묶여 있다니!

터진 옷 틈새로, 별빛, 진주빛,

살들이 마구 삐져나왔다

안에서 파열하는 존재,

가난한 집안의 숨겨진 재산들

 

나는 아이들이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다시 말하면 삶이…

아니면 가난해도 이토록 당당한

아이들의 실존이, 또는 그것을

지키는 어느 시인들의 밤샘이…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김정란 시인 / 파비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달려갔다. 어머니, 착한 어머니.

 

길이 우리 앞에 있었다. 시간이 죽은 거리.

우리는 나비처럼 옷을 벗었다. 어두움.

뱀처럼 꿈틀대는 길. 그것은 우리보다 강했다.

 

누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진실보다 아름다웠다. 진실을 향해 옷을 벗어던진 여자.

진흙이 일어섰다. 안녕.

 

"너무 늦었어요. 너무……"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삼켜졌다.

인류의, 타락한 종족의 방황이 신(神)을 겨누고 흔들렸다.

도처를 향(向)한 표적.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김정란(1953년, 서울 ~ )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시인이자 평론가, 번역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대한민국 시단에서 가장 전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를 쓰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여성주의적인 창작 활동, 문학 비평을 전개하는 한편, 대표적인 사회 참여 작가이기도 하다. 2003년부터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김정란은 1976년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선보인다. 문단에 나온 뒤 그는 이제까지 『다시 시작하는 나비』(1989) · 『매혹, 혹은 겹침』(1992) ·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1997) · 『스·타·카·토· 내 영혼』(1999) 등의 시집과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미완의 시학』(1993), 사회 문화 에세이집 『거품 아래로 깊이』(1998)

등을 펴낸 바 있다.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문) 수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