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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반달
내가 취하면 사람들은 모조리 비틀거린다 내가 취하면 유월(六月)에도 울긋불긋 단풍이 든다 북한에 반달이 비치면 더 밝듯 남한에도 반달이 비치면 정월 보름보다도 더 밝으니 이상하다 왼발로 걸으면 오른발에 날개가 돋아나는 밤아 나는 따가운 물을 마시고 이 땅을 걸었을 뿐 그렇다, 눈을 감을 때만이 미행(尾行)하는 놈들이 보이고 입술을 다물 때만이 미행(尾行)하는 놈들의 목소리가 어찌하여 내 몸뚱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새어 나가는가 오른발로 어둠을 밟아야만이 왼발에 기적(奇蹟)이 생긴다 왼발로 남한을 걸어야만이 오른발에 북한이 밟힌다 허허, 남한이 아니면 북한 중에 어느 한쪽이 밤하늘에 저런 반달을 토해 놓았는가 부다 캄캄한 하늘로 날아가서 토해 놓았는가 부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밤거리의 노래
깜박이는 불빛 멀어져 가는 사람 아아, 그대를 보내고 그대를 보내고
비가 내리는 거리 가슴이 넘치는 거리 우리들 그러나 여기에 마음을 세워 둔다
죽음이 죽음을 속이고 희망이 희망을 속여도 우리들 그러나 여기에 마음을 세워 둔다
아아, 넋이여 온몸이 밤으로 뭉치어 떠나는 옛사랑의 넋이여.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김준태 시인 / 밥
밥이 무엇이냐 밥과 밥이 자꾸 만나서 밥만을 노래하는 저 눈물겨운 밥의 나라
밥이 사람을 속인다 밥이 사람을 후려친다 밥이 하늘과 땅을 속이고 밥이 자유의 가는 길마저 처참하게 난도질한다
밥이여 어쩌면 한 시대의 무덤과도 입맞추는 캄캄한 절벽이여 사람들은 밥을 먹기 위해 오늘은 어느새 밥이 돼버린다
밥이 무엇이냐 사랑이냐 꿈이냐 몸부림이냐 또 무엇이냐
밥이 거꾸로 사람을 걷게 하고 밥이 거꾸로 울음 우는 저 고요한 밥의 나라
밥아 정말 정말 개똥이 되어서는 안 될 오, 찬란한 밥의 나라 어쩌지도 못할 정든 밥의 나라!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밭 여자(女子)
기니아의 시인(詩人) 케이타 포데바 풍(風)으로
1
여자는 누군가의 아이를 낳고 있었다. 불타는 집을 뛰쳐나와 여자는 누군가의, 누군가의 아이를 낳으며 누군가의, 누군가의, 누군가의, 누군가의, 누군가의 아이를 낳으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어떤 거대한 죽음처럼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어떤 거대한 삶처럼 태어나고 있었다. 아, 핏덩이의 아이와 함께 태어나는 여자의 죽음, 여자의 생살의 삶! 아, 그때 밭은 여자의 몸부림을 받아먹고 싱싱해지고 있었다. 총소리 속에서, 총소리 속에서도……
2
여자는 사내의 옷을 깁고 있었다. 여자는 사내의 그림자도 깊이깊이 깁고 있었다. 여자는 사내가 남긴 숨결마저 깁고 있었다. 사내가 남긴 몇 방울의 눈물도 찾아서 깁고 있었다. 살아야겠다고, 우리들도 이제 살아야겠다고, 여자는 몇 번이고 스스로 맹세하면서 쟁기의 보습을 닦고 있었다. 쇠스랑도 닦고, 호미도 닦고, 낫과 숫돌도 닦고, 그리고 여자는 지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 그때 여자의 지게 위에 꽂혀진 새벽의 태양, 새벽의 머나먼 길!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벽은 무너져야 벽이다
손으로 어루만져선 모른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손으로 어루만져선 우리는 그것이 벽인 줄을 알 수 없다
그것이 감춰진 마음으로 솟아 있을 때 벽은 이마로 이마로 찍어봐야 알 수 있다 이마로 이마로 들이받아 찍을 때야 벽은 자신이 벽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오 핏덩이가 묻어 있는 벽만이 벽일까 그림자만이 기대어 어른거리는 벽 밑에서 세상의 모오든 길은 벽에 가서 부딪치고 핏덩이가 묻어 있는 벽은 그러나 끝끝내 우리에게 부딪쳐 허물어진다
오 벽은 무엇하기 위해 솟아 있을까 허물어지기 위하여 다시 솟아나는 것일까 그렇다 그렇다 벽은 무너져야 벽이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벽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벽이 될 수 없다
벽이여 캄캄하고 더럽고 우습고 무섭고 답답하고 좌우지간 벽이여 밥과 죽창과 화살과 총칼로 짓이겨진 벽이여 벽은 무너지면서 비로소 벽으로 증명된다.
불이냐 꽃이냐, 청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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