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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1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가는 것, 떨어져가는 것, 시들어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
이웃에서 항해하던 배가 한 척 침몰하였다. 야음(夜陰)을 타고 우리는 그가 살았을 때 떠 있던 그의 항로 위를 가 보았다. 대전 오류동의 물살이 거세었나 하늘에는 별, 땅에는 시인(詩人) 이승을 밝히던 그의 항해등도 울음소리도 물결 속에 흔적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때묻은 돛폭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다감하던 우리의 선량한 어부,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노질하는 우리의 돛대 위에 앉아 깃털을 날렸다. 해저를 걸어 천주교 공동묘지에 그의 유해를 조용히 내렸다. 해저 속에 그를 수장(水葬)하며 비로소 우리는 고인(故人) 몰래 눈물을 뿌렸다. 감추고 억제하던 우리의 슬픔을 우리들이 맞이한 이날의 부음(訃音) 위에 비로소 마음놓고 뿌릴 수 있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3
아무리 노질을 해도 이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구나. 물길은 사납고 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노예선을 보았다. 약 5천만 톤의 선적 위에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못질되어 있었다. 여보, 이 배는 어디로 가지요. 황량한 을지로의 물목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배를 갖지 못한 자의 노질을 바라보다가 선창을 닫았다. 어제 삼각지의 비 오는 해협에서 침몰했던 한 불행한 남자(男子)의 난파 때문에 깊게 방수되어 있는 나의 조타실이 침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선창을 굳게굳게 닫아걸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핑계삼아 읽다. 비안개 속에서 어디선가 슬픈 무적(霧笛) 소리 길게 두 번 울린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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